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유승민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 개혁 처리 무산으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선생님이 숙제를 하나 내줬다. 난해한 문제지만 문제지를 받아든 학생들은 조를 이뤄 어떻게든 풀어보려 애썼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꾸 다그친다. 풀어가는 과정에서 간섭하고 훼방 놓고…그래서 학생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이걸 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린다.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이 딱 그랬다.”
친박성향의 한 초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공무원연금 개혁의 데드라인을 4월로 정한 것부터가 패착이라고 했다. 선진국도 수십 년이 걸린 연금 개혁을 무슨 수로 뚝딱 도깨비 방망이질로 풀 수 있냐는 푸념이었다. 그는 “문제를 낸 선생님의 ‘저의’를 알 수가 없다. 그 정도 공식(‘딜’을 뜻하는 듯 했다)을 넣지 않고 여야가 합의할 수 있다고 본 것일까”라며 “국회의원 4선의 경험칙으로도 알 수 있다. 국회 선진화법 때문에 무조건 야당을 안고 가야 하는데 BH(청와대)의 방해가 심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렇다. 지금 정가에선 ‘BH의 공작’을 이야기한다. 개혁할 마음이 컸는지, 커가는 비주류 당 지도부를 뭉갤 마음이 컸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당 지도부 중 한 명은 “BH가 순진한 것인지, 악의적인지 알 길이 없다”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중남미 순방 이후 박 대통령의 멘트를 보면 개혁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당 지도부를 한번 누르기 위해 어깃장을 놓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대목이다.
새누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사석에서 “여야가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합의한 것을 두고 청와대 관계자가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 연계 합의는 ‘국회의 분명한 월권’이라 한 대목까지는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박 대통령이 직접 ‘국민께 큰 부담을 지우는 문제’라고 하셨다”며 “그동안 해놓은 것 없다는 비판에 시달려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도 일단 마침표를 찍자 했거늘 박 대통령은 교과서적인 멘트로 일관하면서 여야 합의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고 불쾌해했다.
다른 음모론은 친박의 ‘비토 세력론’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판을 깨 비주류 지도부의 구심력을 흔들려는 친박이 여당 내 분열을 불러왔다는 이야기다. 박 대통령이 국민연금 연계는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고 밝힌 것까지는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도 그 이후 친박의 반격은 엄청났다. “지뢰를 밟았다”(서청원 최고위원), “세금을 올리자는 것과 같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한구 의원), “합의안을 즉각 철회하고 당과 국민에게 사과해라. 모든 직을 걸고 철회시키겠다”(김태호 최고위원), “국민연금 연계는 혹 떼려다 머리만 한 혹을 붙인 꼴”(김태흠 의원) 등의 발언은 누가 봐도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한 것이었다. 특히 김태호 최고위원은 그 며칠 전 합의안에 서명한 김무성 대표를 등에 업어 올린 것과 오버랩되면서 가벼운 처신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친박의 발언이 고구마 줄기 엮듯 나오자 정치권 한 인사는 이렇게 해석했다.
“친박은 사실 죽기 살기다. 성완종 파문으로 내년 총선 공천은 멀어지고 있고, 대통령 지지율도 빠지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연금 개혁이 덜컥 성사돼 ‘K-Y라인’에 그 공이 돌아가면 친박은 공멸하게 된다. 가뜩이나 재보선 압승으로 김 대표 주가가 오르는 마당인데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고 본다. 물론 개혁에 성공해 박 대통령의 ‘공천 지분’이 확대되는 것도 좋겠지만 친박으로선 국민 편에 선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미지를 더 따졌다.”
믿을 만한 전언에 따르면 당 지도부에서도 막판 엇박자가 났다. 공무원연금 개혁 실무기구의 합의내용 중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50%’ 명기 부분이 나왔을 때다. 일부는 받아들이더라도 처리하자는 쪽이었고, 일부는 국민연금까지 손대면 파장이 만만찮다며 야당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판을 접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그러다 김 대표와 유 원내대표는 “국민대타협기구 및 실무기구의 ‘공적연금 강화 합의문’을 존중한다”는 최종 합의문에 사인하게 된다. 지도부도 일사불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가에서는 ‘싸움에서는 졌지만 정작 웃고 있는 이는 새정치연합’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나리오에 없던 국민연금 연계 문제를 슬쩍 끼워넣음으로써 국민을 분노케 해 여당을 궁지에 몰았다. 특히 문재인 대표의 ‘득’이 생각보다 크다는 분석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막음으로써 공무원 사회를 같은 편으로 돌렸다. 재보선 실패에 대한 책임론을 일부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 간 분열을 일으킴으로써 반대급부를 얻게 됐다. 여권 한 인사는 “문 대표로선 표정 관리가 어려울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새누리당 정책위 소속 한 의원은 “여당의 무력감이 꽤 오래갈 것 같아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김 대표나 유 원내대표는 무엇보다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만은 현 정부에서 가장 잘한 일로 여겼고 애정을 갖고 애를 썼는데 빈손으로 막을 내렸다. 공무원연금 재협상이 어려운 것은 국민연금 연계안을 도로 집어넣을 수 없고, 그 탓에 야당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앞서의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공무원연금 개혁을 마무리해야만 다른 일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연금 개혁은 ‘똥차’와 같다”며 “당 지도부로선 청-정과 전면전으로 갈 수도 있다. 연금 개혁 실패에 대한 출구전략 중 하나”라고 귀띔했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국민연금 개혁실패의 후폭풍을 어떻게 반격해나갈지 주목된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