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왼쪽)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DMZ 도보 횡단을 희망한다”며 남·북한 당국에 승인을 촉구하고 있다. 오른쪽은 월트 디즈니의 손녀인 미국 영화제작자 애비게일 디즈니. 연합뉴스
지난 3월 11일 여성 운동계 ‘대모’로 불리는 글로리아 스타이넘(미국)이 뉴욕 유엔본부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스타이넘은 DMZ를 걸어서 통과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른바 ‘위민 크로스 디엠지’ 프로젝트다. 페미니즘 역사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스타이넘이 이번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행사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메어리드 맥과이어(북아일랜드), 리마 보위(라이베리아) 등 세계 여성 지도자들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주최 측에 따르면 12개국 30여 명의 참가자들은 5월 21일 평양에서 ‘여성과 평화 만들기’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 뒤 24일 오전 판문점을 통과할 것으로 전해진다. 행사 기획자 중 한 명인 정현경 미국 유니언신학대 교수는 “조화와 평화의 상징인 색동 목도리를 목에 걸고, 남북이 하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각보를 들고 DMZ를 걸어서 건널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행사를 전후로 남북한 여성 지도자들과도 만나 한국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일본 여성계 인사 참여도 유력한 상황이다.
미국에서도 DMZ 걷기 행사는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황폐하게 했던 격렬한 정치적 갈등 종식을 도운 것은 여성이었고, 10여 년 전 라이베리아의 잔혹행위 중단을 외쳤던 사람들도 여성이었다”며 “이제 여성들이 분단된 한반도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를 두고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주도한 ‘소떼방북’에 버금가는 퍼포먼스가 될 것이란 반응이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에는 여성 대통령이 있고 미국에는 흑인 대통령이 있으며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이분들이 퇴임하고 시간이 지나면 모멘텀도 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 평화 운동가들이 한반도를 주목한 것에 대해 스타이넘은 기자회견에서 “지난번 방한해 DMZ를 방문했을 때 미국의 남북전쟁이 떠올랐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서로의 생명을 앗아간 남북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미국은 없다. 한반도 역시 6·25를 극복해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와 번영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타이넘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 역사에서 용서와 이해, 대화로 상징되는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걷기 행사를 추진한다”면서 “승인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꼭 이뤄지길 희망한다”며 남북 당국 협조를 촉구했다.
먼저 입장을 내놓은 것은 북한이었다. 5월 3일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국제여성대행진’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고 보도했다. ‘위민 크로스 디엠지’를 지원하기 위해 출범한 단체다. 조선중앙통신은 “국제 여성 대행진은 통일과 평화를 바라는 국제사회의 목소리를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최 측이 4월 중순 북으로부터 받은 문서에도 “행사 성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력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북은 통일부에 5월 24일 남측 입경 계획을 알리며 협조를 요청하는 통지문을 발송한 상태다.
이에 대해 통일부는 “책임 있는 북한 당국 승인이 공식 확인되면 우리 정부도 정전협정과 과거 전례를 고려해 필요한 협조를 하겠다”며 “북측 단체에서 행사와 관련한 계획을 알려옴에 따라 판문점 도보 통과 등 문제에 대해 유관부처와 협의를 거쳐 필요한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커다란 걸림돌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성사는 거의 확정적인 분위기다. 판문점을 넘기 위한 또 다른 관문인 유엔군 사령부에서도 ‘한국 정부 동의’를 전제로 잠정 승인 방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마지막 ‘공’이 한국 정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앞서의 정현경 교수는 “판문점을 넘기 위해서는 유엔군사령부(유엔사) 허가가 필요한데, 유엔사는 한국으로부터 공식 문서를 받아오면 허가해주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긍정적으로 결정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 대해 일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 등은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평화행진이 역설적으로 북한 정권 정당성을 옹호할 수 있다”면서 “여성 운동가들은 반인도 범죄의 피해자인 북한 여성들을 먼저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버타 코헨 전 국무부 인권담담 부차관보도 워싱턴 정보지인 <넬슨리포트>에서 “여성인권 운동가인 스타이넘 씨가 먼저 반인도 범죄를 규명한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읽은 뒤 방향을 결정하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가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있는 것도 이 부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부 당국자는 4월 16일 기자들에게 “남북 관계나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야기함이 없이 순수한 사회문화 교류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자칫 정치적 목적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이 당국자는 “미국 내에서 북핵이나 북한 인권 문제 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행사라는 지적이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도 언론 문의에 대해 미국 국민의 방북 시 안전을 우려하면서 행사 추진 자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타이넘은 “우리더러 순진하다는 지적들을 한다. 우리가 처음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행진을 시작했을 때도 똑같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해냈다”며 “입이 있어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북한 주민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스타이넘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접촉의 단절은 더욱 단절을 가져오는 반면 잦은 접촉은 더욱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이번 행사가 북한 정권을 정당화할 것이란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스타이넘은 “과거 북아일랜드의 종교와 지역 분쟁이 평화적으로 정착된 배경에는 여성들이 경계를 넘어 주도한 평화운동이 있었던 만큼 한반도에도 이런 여성들의 시도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연구소 소장도 “지난 수년 간 한반도 이슈를 다뤄온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이들은 별로 성취한 게 없다. 여성들의 비무장지대 걷기 행사는 정말 멋진 아이디어”라며 찬사를 보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