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민간교류협의회 김승균 명예이사장은 “5·24조치 이후 조직 자체가 고사 상태”라며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이 중단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그렇다. 북측에선 협의회를 상당히 인정해줬다. 다양한 물품으로 47차례의 인도지원 사업을 하는 동안, (물품과 우리의 사업에 대해선 아무런 불만 없이) 거의 주는 대로 다 받아줬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롤러스케이트도 물품 중 하나였다.”
―협의회가 진행한 대표적인 합작 사업으로 ‘6·15 사료공장(2006년 평양 강남군에 준공)’이 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됐나.
“6·15 사료공장은 남북합작사업 중 유일하게 ‘6·15’ 명패를 붙인 사업이다. 위(북한)에서도 상당히 귀중하게 생각한다. 북에 가보니 농업이 취약하더라. 무엇보다 토질이 나빴다. 토질은 단지 비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토질이 좋아지려면 퇴비가 필요했다. 짐승을 기르면 퇴비를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영양보충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북의 축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계획했고, 사료공장은 그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것이다.”
―재원 마련과 구체적인 지원 사업은 어떻게 진행된 것인가.
“당시 재원은 통일부의 협력기금과 일부 후원에 의해 마련됐다. 초창기엔 공장 건설은 물론 사료의 원재료인 밀기울(밀의 찌꺼기), 대두박(콩의 부산물), 강냉이 등을 수입해 넣어줬다. 하지만 이 사업도 결국 이명박 정부 이후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엔 올라가지 못하니, 볼 겨를이 없었다.”
―5·24 조치가 시행된 지 벌써 5년째다. 이렇게 장기화될 줄 알았나.
“전혀. 처음엔 잠깐 그러다 말겠지 싶었다.”
―일각에선 정부의 의지만 있으면 해제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왜 안 풀린다고 생각하는가.
“(잠시 생각하며) 아마도 우리 정부는 ‘북한은 우리 지원이 없으면 망한다’는 미망에 빠진 것 아닌가 싶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북한이 왜 망하겠는가.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통해 어려움을 겪은 바 있지만, 그러한 어려움과 굶주림은 우리 남한도 전란 당시 다 겪어봤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네팔에 지진이 났지만, 그래도 네팔은 살아남을 것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무엇인가.
“만약 이것을 해제한다면, (5·24 조치의 단초가 됐던) 천안함 사건 당시 전몰한 장병들의 목숨을 헛되이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조치와도 연관이 있다. (한국이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1995년 10월 4일 한 일간지에 거재된 ‘남북 민간교류 추진’ 기사.
“당시 북한에서 새로운 고구려 고분이 발견됐다. 해서 우리 역사학자들이 북으로 올라가기로 계획했다. 북측에서도 보존을 위해 덮어 놓은 고분을 다시 개방해 주기로 했다. 또 당시 우리 학자들이 평양을 통해 육로로 백두산으로 가는 프로젝트도 포함됐다. 그런데 5·24 조치로 인해 딱 중단됐다.”
―지난 5년간 협의회는 어떻게 운영했나.
“이전에도 우리는 정부로부터 대북사업 지원금 이외에 운영자금은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20년간 협의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사무실 임대료와 인건비를 대는 바람에 내가 거지가 다 됐다. 더군다나 5년간 사업이 막히는 바람에 회원들의 기부금도 거의 끊겼다. 조직 자체가 기진맥진해 있다. 이제 난 협의회에서 물러난 상황이다. 운영은 새로 취임한 이사장과 상임대표가 하고 있다. 이제 내 나이도 팔십이 다됐는데 물러나야지 않겠나.”
―왜 통일운동 뛰어 들게 됐나.
“갑자기가 아니었다. 난 원래 4·19 혁명 당시부터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1960년 민족통일학생연대가 만들어졌을 때, 이듬해 2월부터 난 연락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때 우리가 내세운 것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아니었나. 이러한 통일운동은 오랫동안 염두에 두었다. 1988년 직선제 도입 이후 이제 남은 것은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해서 그 운동의 방안으로 ‘민간교류’를 생각한 것이다. 정부가 맡아하는 것은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정치를 배제하고 순수 민간인들이 교류를 해보자고 말이다.”
―1989년 협의회가 설립됐다. 남북민간교류 단체로서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보다도 앞서서 최초로 설립된 단체였다.
“협의회 설립 당시, 힘을 받기 위해 양 김씨(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진영 인사를 다 끌어들였다. 김대중 쪽의 정대철(당시 문공위원장)과 김영삼 쪽의 박관용(당시 통일위원장)이 참여했다. 또 회원으로 한완상 전 통일부 장관과 한승헌 전 감사원장이 있었는데, 이들에 부탁을 해서 법인화를 했다. 초대 이사장은 박형규 목사였다.”
―협의회의 주된 사업은 인도적 대북 지원 사업이었다.
“애초엔 그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원래는 민간교류의 구심체로서 결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데 앞서 갑자기 민화협을 만들었다. 애초 있었던 우리 협의회와 똑같은 성격의 단체를 하나 더 만든 셈이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인도적 지원 사업을 주로 하는 조직으로서 성격이 바뀌게 된 것이다.”
―민화협으로 인해 조직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인도적 지원 사업도 꼭 필요한 사업 아니었나.
“그렇더라. 1994~1995년 사이에 북한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나. 사실 난 사업 초창기만 하더라도 북한이 잘 산다고 생각했다. 대기근 이후 북에 가보니, 정말 뭐 하나라도 안 들고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이 어렵더라.”
―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5·24 조치 직전 북에서 겪은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북측 인사가 우리 일행을 데리고 묘향산에서 융숭한 대접을 한 적이 있다. 술이며 고기며 묘향산에서 잡은 숭어까지 손님으로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북한의 금산학교를 들렀다. 당시 한겨울이었는데 우리에게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학생들이 강당에서 두 시간 동안 덜덜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민망한지 몰랐다. 공연을 마치고 눈물이 나더라. 해서 학교 측에 선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북측 인사는 손사래를 치다 결국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지원을 약속하고 남으로 내려왔는데, 부도(5·24 조치를 지칭)가 나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미안하다.”
―우리 정부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참을 생각하다 그는 겨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기대 안한다. 한 번 보면 (현 정부가 남북교류 물꼬를 틀 의지가 있는지) 다 안다. 꼭 한 가지 말한다면, 북의 지도자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돼야 한다. 한 인간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대한다면 못 만날 이유도 없지 않겠나. 남북 모두 서로 상대방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한 평생 민주화에 투신 김지하의 문제작 ‘오적’ 직접 의뢰 김승균 남북민간교류협의회 명예이사장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한 평생 투신한 인물이다. 성균관대학교 재학시절인 1960년 4·19 항쟁의 참여를 시작으로 이듬해 5·16 군사정변 당시 반대시위를 벌이다 구속돼 징역을 살기도 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가담해 다시금 구속과 석방을 반복했다. 1965년 대학 졸업 후에는 출판계에 투신한다. 특히 그는 한국의 지성을 상징했던 월간 <사상계>에 입사하며 편집장을 지냈다. 무엇보다 김 이사장은 1970년 <사상계> 편집장 당시 ‘오적 필화 사건’에 연루된 4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는 김지하 시인에게 문제작 ‘오적’을 실제 의뢰한 인물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 이사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한일협정반대투쟁 당시부터 김지하를 잘 알았다. 당시 4·19 혁명 10주년 기념호를 앞두고 김지하에게 ‘오적촌(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지칭하며 오적촌은 이들이 모여 살았던 동빙고동을 말한다)’을 묘사하는 시를 부탁했다. 시를 써왔는데 참 재미있었다. ‘벽자(흔히 쓰지 않는 문자)’가 워낙 많아 제작에 4~5일이 더 걸렸다. 걱정을 참 많이 했는데, 책이 너무 잘 팔리더라.” 하지만 이 ‘오적’으로 인해 김승균 이사장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그가 몸담았던 <사상계>는 문을 닫고 만다. 김 이사장은 출소 후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지만 다시금 수배령이 떨어져 6년간의 도피생활을 겪는다. 그리고 1977년 체포돼 다시 한 번 1년간의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출소 후 그는 지금까지도 엄혹한 시절 등불로 회자되는 출판사 ‘일월서각’을 창립한다. 일월서각은 당시 정부가 금서로 지정했던 외국의 명저들을 들여와 지성인들의 지적 배고픔을 달래줬다. 1986년엔 금서 전시회까지 개최해 수배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 일월서각의 창립에도 숨겨진 일화가 있다. “(출소 직후인 1978년) 당시 난 장기표, 김근태, 조영래, 손학규 등 수배령이 떨어진 많은 사람들을 숨겨주고 있었다. 그때,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날렸던 임헌영 씨(현 민족문제연구소장)가 내게 와 광화문에서 ‘삐라(전단지)’를 뿌리자고 하더라. 당시 난 거절했지만, 임헌영은 그대로 일을 감행했다. 그는 이후 공포와 고초 때문에 당시 입었던 옷도 보기 싫고 밥도 먹기 싫어했을 정도로 후유증에 시달렸다. 내가 임헌영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러다 삐라를 합법적으로 대량으로 뿌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출판사를 세운 것이다. 출판의 자유는 보장되니, 징역을 받아도 얼마나 받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데 잡아가지도 않고, 어느 정도 돈도 벌리더라(웃음).” 김승균 이사장은 삐라를 뿌리던 심정으로 일궜던 이 일월서각을 아무런 조건 없이 후배에게 물려줬다. “능력이 없어서 물러났다(웃음). 지금은 수배 시절 나를 도와줬던 운동권 후배(백명수 대표)에게 물려줬다. 출판시장이 어려워도 30년을 운영했는데 일월서각은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그저 독자들에게 넘겨준다는 생각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떠났다.” [한] |
남북민간교류협의회는? 47차례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 남북민간교류협의회는 지난 1989년 국내에선 처음 설립된 대북 민간교류단체다. 1998년 설립된 민화협보다 무려 9년이나 앞서 설립됐다. 1993년 법인화 이후 수많은 민간교류사업을 진행해 왔다. 특히 협의회는 2001년 의류지원 사업을 시작으로 모두 47차례의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2010년 4월 아동 의약품 지원 사업을 끝으로 5·24 조치로 인해 사업을 잠정 중단한 상황이다. 대표적 사업으로는 2006년 준공한 평양 6·15 사료공장 사업이 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