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지 아니한가>의 한 장면.
중학생인 이 아무개 군은 집으로 들어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숨도 돌리기도 전에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빨리 저녁 먹고 숙제해”라고 말했다. 이 군은 엄마의 잔소리에 속으로 ‘XX 빡친다’라는 생각뿐이다. 이어폰을 꽂은 채 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느새 뒤로 온 엄마가 “그렇게 해서 공부가 되니?” 하며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버렸다. 순간 이 군은 “아 씨,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좀 내버려둬!”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군은 정말 엄마의 관심이 싫은 것일까? 정말 알아서 공부할 자신이 있었을까? 나중에서야 이 군은 “아니다”고 했다. 이 군은 공부할 때 엄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실제로 엄마는 암기과목 공부를 종종 도와주고는 했다. 그럼에도 이 군이 엄마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공부를 도와주는 엄마가 한숨을 쉬며 “이거 몰라?”라고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이 군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한마디가 거부의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군의 엄마는 깜짝 놀랐다.
중학교 3학년인 신 아무개 군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아이다.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한 신 군은 결국 학교도 중단한 상태였다. 지금처럼 부모님에게 도움 받고 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땐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말 신 군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아이일까? 오랜 시간 후에 어렵게 털어놓은 신 군의 사연에는 체벌을 한 아버지에 대한 무력감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아래층과 층간소음 문제로 싸우는 것을 들은 신 군은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자신이 부모에 대한 분노를 누르려고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피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 군이 모든 것에 호기심을 잃었던 이유는 부모에 대한 실망을 처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윤 아무개 양 가방에는 ‘저렴이(고가의 화장품과 품질과 효과는 비슷하면서 가격이 절반 정도인 저가 화장품)’가 꼭 들어있다. 윤 양은 손에 들린 스마트폰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셀카를 찍어본다. 하지만 가끔은 ‘엄마는 날 왜 이렇게 낳아서!’라는 생각에 괜한 짜증이 나기도 한다. 윤 양은 매번 찾아오는 방학 때마다 성형수술을 시켜달라고 엄마를 조르고 있다.
이유 없는 반항과 짜증이 늘어난 아이를 앞에 두고 엄마는 갈팡질팡한다. 아무 것도 되고 싶은 것이 없다며 아이의 우울감이나 무기력이 극에 달하는 시점에 부모는 아이를 잘못 키운 것은 아닌지 자책하기도 한다. 윤 양처럼 공부보다는 연예인이나 친구관계, 외모에만 신경 쓰는 아이를 부모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사춘기의 정점에 찾아온다는 중2병. 병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질병으로 분류되는 공식적인 의학 용어는 아니다. <중2병 완전정복>의 저자인 노규식 연세휴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늦잠을 자기 시작하거나, 방문 닫는 소리가 커지고, 스마트폰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면, 중2병의 증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며 “이 시기에는 독립성과 충동성이 강해진다.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동영상이나 메시지 사용이 급증하는 시기다. 이런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부모님들이 ‘아, 이제 (중2병으로) 가는 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2병은 여러 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이 군의 경우처럼 거친 고집불통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신 군의 경우처럼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모습을 하고 등장하기도 한다. 윤 양처럼 연예인이나 친구관계 등이 세상의 전부가 되는 증상도 있다. 이처럼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게 있다고 설명한다. ‘자기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하는 생각과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생각이 그것이다.
꼭 한번은 찾아온다는 중2병 아이들의 이 모순된 언어와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2병 아이들이 가장 많이 쓰는 ‘그냥’, ‘몰라’, ‘내가 알아서 할게’와 같은 말들 이면에는 ‘나도 지금 내 마음을 모르겠어’, ‘지금 말하고 싶지 않아’, ‘간섭은 싫지만 필요할 때 도움은 줬으면 좋겠어’와 같은 뜻이 담겨있을 때가 있다.
노규식 원장은 “중2병 시기 아이들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이들의 언어적 능력을 이해해야 한다. 이 시기는 기억력과 논리력이 발달한다. 하지만 감정을 말로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시기이기도 하다”면서 “아이들이 ‘그냥’이라고 해도 그 밑에 분명 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그냥’이라고 하면 ‘엄마는 세상에 그냥은 없다고 생각해’라며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한 번 더 만들어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개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와 같은 말들이 나오면 부모는 아이와 부딪히지 않는 게 낫다 싶어 대화를 회피하거나 중단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대화를 한 번 더 이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여자아이에 비해 감정표현이 서툰 남자아이라면 감정의 예를 들어줘 선택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청소년상담 전문가인 이진아 브랜드유리더십 소장은 “여자아이는 설명하지 않고 명령형으로 이야기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반면 남자아이들은 불필요한 설명 없이 본론만 이야기 해주길 바란다. 여자아이에게는 부연설명과 감성적 접근이 필요하다면 남자아이들에게는 아기 다루듯 일일이 설명하는 방식을 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이와 함께 음악을 듣거나 아이가 하는 행동에 호기심 어린 태도로 다가가는 것도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방법이다. 노규식 원장은 “여자아이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아진다. 그래서 셀카를 계속해서 찍는다. 지난해 미국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세미나에서 셀카를 찍지 않는 여학생들이 오히려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뜻”이라며 “아이가 셀카를 찍을 때 관심을 보이면서 ‘예쁜 각도’를 함께 찾아준다면 아이도 좀 더 편안한 대화를 할 수 있다. 기억이나 추억을 공유하기 좋은 음악을 함께 듣고 이야기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다.
아이들의 ‘무언의 언어’를 포착하는 것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진아 소장은 “아이들의 말만으로 그 아이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말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의사표현일 수 있다. ‘우리 아이는 조용하게 중2병이 지나간 것 같아요’는 많은 부모님들이 하는 착각이다. 만약 우리아이는 아무 탈 없이 조용히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나는 네가 무탈하게 중2병을 보내줘서 고마워’라고 솔직하게 표현해보자”라고 당부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빠르면 초등생부터 겪는다 SNS 아이디 등 공유…울타리 쳐줘야 중2병을 설명하는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중2병은 일반적으로 사춘기의 정점에서 나타나는 가장 심한 감정기복과 심리적 불안 상태가 복합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증상으로 본다. 과거 사춘기에 비해서 오늘날 통용되는 중2병은 증후가 나타나는 시기가 빨라지고, 자기 생각 표출도 거침이 없어지고 있다. 정병오 교사는 “과거 학생들이 대입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요즘 아이들은 특목고 같은 고입 스트레스가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입 경쟁에 내몰리는 시스템이다.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더욱 늘어났다. 과거 사춘기가 나타난 시기보다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규식 원장은 “과거에 비해 아이를 많이 낳지 않다보니 개인화되는 경향이 있다. 부모의 생각도 서구화됐다. 아이들의 경쟁도 빨라지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늘어났다. 요즘에는 빠르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2병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엄마들 사이에서 ‘악의 축’으로 통하는 스마트폰의 등장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실제로 스마트폰 때문에 중2병 아이와 전쟁을 치르는 부모들이 많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면 역효과만 난다. 노규식 원장은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건넬 때 ‘자격과 능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너의 권위’라고 알려주는 방법을 소개했다. 그는 “PC방은 아이를 잡아오면 되지만 스마트폰은 아이 손안에 있어 부모의 통제가 어렵다”며 “부모가 타협을 하지 않아야 하는 선도 있다.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이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 원장은 “요즘 학교폭력위원회에서는 증거로 SNS 자료가 쓰인다. 나체사진을 올렸다 유출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말로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공유해야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줘야 한다. 단, 공유하는 일상을 꼬치꼬치 캐묻거나 따지는 것은 안 된다. 아이디를 공유하는 이유는 내 아이가 인터넷에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정도로 제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배] |
중2부모병과 중2선생님병 사서 걱정하는 게 문제 믿고 기다려야… 중2병 아이를 보살피는 부모도 변해버린 아이의 눈빛에 한번, 가시 박힌 말투에 한번, 그렇게 마음에 생채기가 생긴다. 아이를 향한 잔소리가 늘었거나, 아이가 한심해 보이거나, 남의 집 아이와 달리 유난히 우리 아이만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하다면 ‘중2부모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에게 거절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중2부모병을 겪고 있는 부모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노규식 원장은 “아이들은 쉽게 일반화를 해버린다. 만약 엄마가 10번 중에 6번을 섭섭하게 했다면 ‘6번 섭섭하게 한 엄마’가 아니라 ‘그냥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당돌한 중2병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 정병오 교사(아현정보산업고)는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에도 권력관계가 있다. 중2병 시기의 아이들은 이 권력에 의문을 품는다. 선생님이 나무라면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선생님이 왜 저를 혼내요?’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실제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부분에서 많은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도 선생님도 약아질 필요가 있다. 아이가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하면 ‘그럼 네 계획을 들어보자’고 해본다. 계획이 없으면서도 간섭하지 말라고만 하는 아이에게는 간섭이 왜 싫은지, 어디까지 엄마나 선생님이 개입을 할지 상호간 약속을 해두는 것이 좋다. 너무 완벽한 부모나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욕심도 버려야 한다. 아이가 독립하려 하는 것과 중2병을 겪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진아 소장은 “중2부모병은 말 그대로 부모가 겪어야 할 병이다. 원인을 아이에게서 찾거나 ‘너 때문이다’, ‘네가 달라져야 한다’며 아이들에게 따지고 들면 안 된다”며 “결국 중2부모병은 사서 걱정하는 것과 불안이 문제다. 우리 애를 잘 키운 만큼 잘 극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병오 교사는 “중2병은 오지 않을 수는 없다. 늦더라도 언젠가는 꼭 한번 오게 돼있다”며 “중2병 아이들의 반항 대상이 부모가 될 수도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중2병 아이들과 긴장관계를 가진 선생님들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감당해야 할 아이들의 변화를 자신이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