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왼쪽)과 여권 핵심부 인사가 은밀한 접촉을 한 정황이 포착돼 관심을 끌고 있다. 반 총장과 박근혜 대통령이 5월 19일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세계교육포럼 개회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반기문 총장 임기는 2016년 12월 31일까지다. 19대 대선을 일 년가량 남겨 둔 시점이다. 반 총장이 권력 의지만 있다면 출마를 위한 시간은 충분하다. 반 총장은 지난해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줄곧 차기 주자 1위를 달렸다. 그러나 정작 반 총장 본인이 정계 입문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면서 정치권에서도 그의 대선 출마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반 총장이 최측근을 통해 새정치연합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밝히면서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은 급격하게 확산됐다. 반 총장의 대선 출마 여부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정치권 초점은 과연 어느 쪽 후보로 나서느냐에 모아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돌발 변수가 생겼다. 지난 4월 8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사건에 반 총장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이다. 반 총장은 성 전 회장이 주도한 충청포럼 멤버이고, 반 총장 동생 반기상 씨는 경남기업 상임고문으로 재직한 바 있다. 권노갑 상임고문이 언급한 ‘반기문 최측근’ 역시 성 전 회장이었다. 그만큼 성 전 회장과 반 고문은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반 총장 조카인 반주현 씨가 경남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베트남 하노이 초고층 빌딩 ‘랜드마크72’ 매각 추진 과정에서 사기 행각(박스기사 참조)을 벌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무결점 대선주자’라는 평까지 들었던 반 총장으로선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 총장은 지난 5월 18일 오후 4시 50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년 9개월 만의 방한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반 총장의 정치적 감각에 주목하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 불똥이 자신에게로 옮겨오자 직접 국내로 들어와 대응에 나선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던 것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만약에 그런 것이라면 반 총장은 언제 승부를 걸어야 할지 아는 정치인이다. 분위기를 확 바꿨다. 타이밍을 잘 짚는다는 얘기다. 성완종 리스트라는 치명적인 악재가 닥치자 정면 돌파라는 강수를 택한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반 총장은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성완종 전 회장을 잘 알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다”라며 적극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된 몇몇 여론조사에서 성완종 리스트 이후 주춤했던 반 총장 지지율은 다시 반등하는 추세를 보였다. 5월 20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는 반 총장이 차기 대선주자 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36.4%)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10%대 지지율에 그쳤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방북 계획을 발표하고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하는 등 ‘거물급’ 인사로서의 행보가 통했다는 분석이다. 이 소식을 접한 반 총장은 기자들에게 “다음부터는 (대권 후보) 여론조사에서 저를 포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반 총장은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절대 그 말은 하지 않는다.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는 반 총장으로선 자신에게 유리한 최상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 심사숙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반 총장은 4박 5일간 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것 외엔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 한 번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마저도 질문 4개만 받았을 뿐이었다. 반 총장은 2006년 취임 이후 방한할 때면 늘 들렀던 고향(충북 음성)도 찾지 않았다. 짧은 기간 탓이기도 하겠지만 성완종 리스트로 촉발된 충청권 게이트가 문제가 되고 있고, 반기문 대망론이 다시 꿈틀거리는 상황에서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아예 없애고자 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처럼 정치권과는 선을 긋는 스탠스를 보였던 반 총장이 입국 다음 날인 19일 친박계 핵심 A 씨와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 회동을 했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어 그 배경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반 총장과 A 씨는 평소 친분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 만남은 충청권의 한 유력 정치인 B 씨가 주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B 씨의 한 측근은 “A 씨가 먼저 반 총장과의 자리를 요청했고, 반 총장 역시 시간을 내줬다.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라면서 “은밀하게 추진된 것인데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A 씨 측은 “사실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반 총장 측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반 총장 지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반 총장은) 일정이 빽빽해서 고향도 오지 못했다. 또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 이런 민감한 시기에 정치권 관계자, 그것도 친박 핵심과 만났을 리 없다”고 잘라 말했다.
친박계는 반 총장과 A 씨 회동에 대해 말을 아끼면서도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했을 때 충분히 개연성이 높을 것이란 반응을 내놓고 있다. 김무성 대표를 견제할 마땅한 대선주자가 없는 친박 핵심부가 반 총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나돈 바 있다. 그러나 반 총장은 그동안 친박계 구애에 별다른 ‘피드백’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 친박 전직 의원은 “지난해부터 반 총장에게 여러 번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안다. 그런데 반 총장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반 총장의 ‘뻣뻣함’에 불만을 털어놓는 의원들도 있었다. 임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핑계를 댔다는데, 반 총장이 ‘간’을 보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거의 와해된 친박계가 반 총장에겐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성완종 리스트라는 뜻하지 않은 위기에 닥친 반 총장이 친박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차원에서 A 씨와 전격 만났을 것이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앞서의 친박 전직 의원은 “성완종 리스트 수사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조카 사기 의혹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현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 총장 흠집을 낼 수 있는 사안들이다. 반 총장으로선 살아있는 권력과의 거리를 좁힐 필요성을 느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 역시 “사실 반 총장이 택할 카드는 그리 많지 않다. 야권은 이미 문재인 대표를 비롯해 박원순·안희정 등 탄탄한 잠룡들이 많아 반 총장이 설 곳이 없다. 여권에선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럼 남는 곳은 친박계뿐”이라면서 “A 씨와 반 총장이 만났다면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