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미국에서 발행된 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악보.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기 위해 일반 노동자의 1주일 급료에 해당하는 20센트를 받고 팔았다고 전해진다.
“애국가를 작곡한 것은 내가 아니라 신이다.”
안익태 선생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신으로부터 영감과 메시지를 받아 오선지에 옮겼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안익태는 1936년 3월 <신한민보>에 기고한 ‘대한민국 애국가’에서 “2년 전에 애국가 처음 절은 완성했지만 후렴은 마무리 짓지 못하고 지내던 중 지난해 11월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완성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애국가는 수많은 명곡을 만든 안익태 음악 인생에 있어서도 ‘운명’이나 다름없는 곡이었던 셈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미국에 머물기 시작한 1930년을 전후로 해서다. 다음은 1936년 안익태의 <신한민보> 기고문 일부다.
“5년여 전 미국에 도착해 몇 가지 느꼈는데 제일 급선무가 애국가 작곡임을 느끼고 결심했다. 지금 부르는 애국가는 스코틀랜드 민요인데 어떤 나라에서는 이를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른다. 이 곡조를 신성한 애국가로 사용함은 대한민국 수치인 줄로 생각된다.”
다른 나라 곡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글이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만들기 전까진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가사를 붙인 곡이 국가로 불렸었다.
애국가가 완성된 것은 앞서의 <신한민보> 기고문을 근거로 1935년 11월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익태가 애국가 필요성을 깨달은 지 5년 만의 일이다. 한 곡을 만드는 데 5년이 걸린 것에 대해 안익태는 “4000년 장구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애국가이니만큼 그리 경솔히 작곡되는 게 아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를 감안하면 1936년 8월에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 당시 마라톤에 출전해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지금의 애국가를 불렀다는 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국가로 불리기까지
미국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한 안익태가 1952년 중남미 순회연주회를 떠나면서 기념촬영한 사진
박 씨 글에 따르면 해방이 되기 전까진 애국가가 국내로 들어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해외에서 급속도로 확산됐던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이는 일제가 애국가의 국내 전파를 철저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금지 단행본 목록에 포함시켜 접근 자체를 막았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5시 중앙방송국을 통해 나온 애국가가 안익태 작이 아닌 구 선율인 스코틀랜드 민요였다는 것만 봐도 일제 강점기 땐 전혀 보급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애국가는 점차 국내에서도 불리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중등음악교과서 편찬위원회는 전국 모든 학교의 음악교과서로 사용될 <임시 중등음악 교본>을 펴냈는데, 첫 번째 곡이 바로 안익태의 애국가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분량인 5만 부가 배포됐다고 하니 애국가가 널리 퍼진 것 역시 이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턴 사실상 공식 국가로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안익태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광복 후 10년이 흐른 1955년이다. 고국을 떠난 지 34년 만의 방문이었다. 안익태는 한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애국가를 직접 연주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본인이 만든 노래가 국가로 불리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본 안익태가 얼마나 감격스러워했을지 쉽게 상상이 간다. 안익태는 부인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 그날의 감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여보.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꼈소.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애국가를 지휘했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이 행복감을 좀 더 실감 있게 맛보기 위해서는 전에 고생을 더 했어야 했던 것이라고 마음먹을 정도요.”
#애국가 지위, 이대로 괜찮은가
애국가는 법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니다. 관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어떤 경로로 국가라는 지위를 갖게 됐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애국가는 1936년 만들어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됐다.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불리다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고 설명한다. ‘해방 뒤 안익태가 보내온 곡이 그대로 불리다가 정부 수립과 함께 국가 대용으로 채택돼 오늘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파리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하는 모습.
1970년대 들어 법적으로 지정되지 않은 애국가를 대체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이들은 애국가가 표절시비에 휘말렸을 뿐 아니라 다소 어색한 리듬과 선율, 소극적인 가사내용 등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애국가가 정부 수립 후 사실상 민족과 국가를 상징해 왔는데 새로운 국가를 만들 경우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란 반대 여론이 더욱 우세했다. 민족혼이 실린 애국가를 단순한 음악적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뒤따랐다.
애국가 지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1997년 공식입장을 표명했다.
“한 나라의 국가가 제정된 연혁을 살펴보면 미국과 같이 법률로 공식 지정된 경우와 영국과 같이 관행으로 정착된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는 후자에 속한다. 안익태 선생 애국가는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실상의 국가로 자리 잡았다. 법률로 지정하지 않은 것은 결코 현행 애국가의 곡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님을 밝혀둔다. 애국가는 국경일 경축식, 외국국빈 방한 행사 등 공식 의전행사는 물론 각종 국제 경기대회에서 국가로 불리고 있으므로 정부는 앞으로 국민들이 더욱 애창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할 방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자 애국가의 법적 근거 마련 필요성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또 실제로 애국가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지난 2013년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은 대한민국국기법을 대한민국국기·국가법으로 바꾸고 ‘대한민국 국가는 애국가로 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당시 전 의원은 “애국가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공식행사에서조차 부르지 않던 일부 세력에 경종을 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애국가 작사가 논란 왜 ‘윤치호’라고 말을 못하나 안익태 선생은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이 가사가 외국 민요에 실려 불리는 것을 가슴아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가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애국가 악보 오른쪽 상단의 작사가 란은 아직도 비어있다. 작사가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여러 설이 대립하고 있다. 지난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가가 누구인지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최종 한 명으로 압축됐다. 바로 좌옹 윤치호(1865~1945)였다. 당시 위원회는 윤치호를 작사가로 확정할 건지 말 건지를 표결에 부쳤고, 그 결과 11대 2라는 압도적인 차로 ‘찬성’이 나왔다. 그런데 위원회는 만장일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미확정’으로 결론을 내렸다. 작사가를 둘러싼 논란의 발단이었다. 그 이후 안창호설, 공동작사설 등이 제기됐지만 전문가들은 윤치호설을 여전히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본다. 객관적인 자료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미국 에모리대학교에는 윤치호가 1945년 9월 딸에게 직접 써주었다는 애국가 가사지가 소장돼 있다. 여기엔 ‘1907년 윤치호 작’이라고 쓰여 있다. 윤치호가 1908년 펴낸 노래집 <찬미가>에도 애국가 가사가 수록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작사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친일 행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윤치호는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뒤 친일파로 변신, 일본제국 귀족원 의원에 선임될 정도로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작사가 규명이 정체된 상태로 논란만 거듭해온 데는 ‘애국가 가사를 친일파가 썼다’는 정서적 불편함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내린 미확정은 윤치호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걸 발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돼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3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애국가 작사가 연구논문’ 발표에서 아리랑 연구 권위자인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면 애국가는 역사의 노래다. 윤치호여서 안 된다면 국민의 뜻을 모아 애국가를 새로 제정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역사적 팩트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며 재차 윤치호설을 강조한 바 있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