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9단(왼쪽)과 조훈현 9단은 한 사람은 일본에서, 한 사람은 한국에서 맹활약하며 한국 바둑의 위상을 높였다.
1989년 조훈현은 세계 최초로 열린 무림 최고수 대회전인 ‘응창기배’에 단기필마로 출전한다. 한국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단 한 장의 대접을 받았던 것. 그러나 대회의 구색을 위한 변방의 장수였던 조훈현은 신들린 검무(劍舞)로 중원의 패자임을 자처하던 일본과 중국의 성주들을 추풍낙엽으로 보내버림으로써 세계 바둑계를 경악시켰고, 한국 바둑에 첫 번째 우승컵을 선사하는 것으로 카퍼레이드를 벌이면서 한국 바둑 대도약기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 한국 바둑이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조훈현 덕분이었고, 그의 제자 불가사의한 소년 이창호는 자신의 나이 서른이 되던 2000년대 중반까지 무려 15년 가까이 한국의 일인자이자 세계의 일인자로 한국 바둑 절정기를 이끈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한국 바둑의 1980년대가 조훈현의 시대였다면 일본 바둑의 1980년대는 조치훈의 시대였다. 조치훈은 1980년 미학파 오다케 히데오의 일본 바둑계 7대 타이틀 중 서열 2위 ‘명인(제5기, 요미우리),’ 81년 우주류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의 3위 ‘본인방(제36기, 마이니치)’ 82년 오다케의 4위 ‘십단(20기, 지금은 7위, 산케이)’, 그리고 83년 벽두 마침내, 전설의 ‘괴물’ 후지사와 슈코의 서열 1위 ‘기성(제7기, 요미우리)’을 쟁취해 서열 1~4위를 석권, 일본 바둑을 평정한다.
7대 타이틀은 예전에는 기성(기세이) 명인 본인방 십단 천원 왕좌 기성(고세이)이 1~7위였는데, 얼마 전에 순위가 바뀌었다. 왕좌와 천원이 4, 5위가 되고 십단이 7위로 밀렸다. 어쨌거나 프로 바둑의 세계대회가 생기기 전까지, 일본의 7대 기전은 바둑의 메이저리그였다. ‘꿈과 권위의 기연(棋宴)’이었다.
조치훈은 1986년 벽두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서열1위 ‘기성’을 넘겨준다. 그때 전 세계 바둑팬들은 휠체어에 앉아 바둑을 두는 조치훈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조치훈은 다시 일어나 1987년에는 제13기 ‘천원’을 쟁취함으로써 일본 바둑사상 최초로 7대 타이틀을 전부 한 번 이상 차지하는, ‘그랜드 슬램’을 이룬다. 그때의 상대도 바로 고바야시였다.
조치훈은 또 1989년에 제44기 ‘본인방’을 다시 차지한 후 1998년 제53기까지 무려 10년을 지켜냄으로써 ‘제25세 본인방’이 되었다. 17세기 초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300여 년 쟁기의 역사에서 선두를 달렸던 본인방 가문이 ‘본인방’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타이틀 이름으로 기증하기 전, 본인방 가문의 장문인은 ‘제00세 본인방 아무개’로 불렸다.
1980년 조치훈(왼쪽)과 조훈현의 대국. 가운데는 김인.
조훈현이 한국 바둑의 별이라면 조치훈은 일본 바둑의 별. 두 사람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20세기 세계 바둑계의 하늘을 밝힌 초거성이었다. 두 사람이 대국한 것은 지금까지 13번으로 나와 있다. 전적은 조훈현 9단이 8승5패. 일본 유학 시절, 저단 때 소년 조치훈이 소년 조훈현에게 두 번 이긴 기록이 있고 1980년 세모에 조치훈이 명인에 등정한 후 고국 팬들에게 인사차 귀국했을 때 속기 한 판, 장고 한 판을 두어 조치훈이 모두 이겨 4연승. 그러나 이후 세계대회에서 만났을 때는 조훈현이 8번을 내리 이겼다. 현재로선 마지막 대국인 2003년 10월 제8회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는 조치훈이 흑으로 이겼다. 이제 12년 만의 재회다.
1953년생 조훈현은 세계 최연소 9세 입단, 1956년생 조치훈은 일본 최연소 11세 입단. 1962년 아홉 살, 여섯 살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조훈현은 1972년 병역을 위해 귀국했고, 조치훈은 병역면제를 받았다. 조훈현으로 인해 프로기사의 병역 혜택이 거론되면서 그것이 국회를 움직인 덕분이었다. 타이틀 획득, 조훈현은 159회로 한국 1등이자 세계 1등. 조치훈은 73회로 일본 1등. 조훈현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화제가 되곤 했는데,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도 일본 바둑계는 조훈현-조치훈이 양분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조훈현 9단도 예전에는 일본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상념이 없지 않았다. 1982년 한국 최초의 9단이 되어 인터뷰를 할 때 조 9단은 “일본에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갈 수가 있어야지”하면서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다. 많은 생각과 정황을 함축한 웃음인 것으로 보였다. 1980년 세모, 81년 정초에 조훈현이 두 번을 계속 졌을 때, 사람들은 조치훈이 조훈현보다 세고, 역시 일본 바둑이 한국 바둑보다 높다고들 말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참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80년 세모면 조훈현이 1차 전관왕을 달성하고 6개월인가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조치훈과의 대국을 전후로 전관왕이 무너졌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고, 한 사람은 한국에서 또 한 사람은 일본에서 한국 바둑을 쌍끌이한 것이 한국 바둑의 오늘을 만든 것이니 그게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두 영웅의 뜻 깊은 대국의 장소로 어디가 좋은가를 놓고 연구들을 하고 있다. 한국기원의 ‘70주년 기념 사업단’에서는 한국기원 1층 바둑TV에서 바둑을 두고, 2층 대회장에서 공개해설, 인터뷰, 사인회 등을 한다고 발표했으나 그것은 가상도일 뿐 광화문, 시청, 서울역 등도 고려 대상이고, 통일의 염원을 담는다는 뜻에서 임진각이 어떠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으며 그밖에 바둑팬들의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것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광구 객원기자
박지연 ‘여류국수’ 탈환 박지연 3단이 두 번째로 ‘여류국수’에 올랐다. 5월 18일 한국기원 4층 본선대국실에서 벌어진 제20기 가그린배 프로여류국수전 결승3국에서 박지연 3단이 김신영 초단에게 흑을 들고 반집승, 2012년 우승 이후 3년 만에 종합 전적 2 대 1로 타이틀로 돌아온 것. 우승 상금 1200만원, 준우승 500만원.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 1분 초읽기 5회.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