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발표를 두고 그룹측은 사업합리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후계구도와 관련된 해석이 지배적이다. 왼쪽은 이재용 부회장. 오른쪽은 이부진, 이서현 사장 자매.
#묘수1: 최적의 합병비율, 제일모직 상장한 이유 드러나
올 3월말 기준 자산은 제일모직이 8.4조 원, 삼성물산이 29.6조 원이다. 자기자본은 각각 4.7조 원, 13.9조 원이다. 지난해 매출도 제일모직이 5.1조 원, 삼성물산이 28.4조 원이다. 어떻게 봐도 삼성물산이 훨씬 큰 회사다. 그런데 양사간 합병비율을 보면 삼성물산 주식 1주에 제일모직 주식 0.35주를 주는 방식이다. 합병발표 직전인 지난달 22일 기준 시가총액이 제일모직 22조 원, 삼성물산 8조 8000억 원이어서다.
증시의 한 관계자는 “52주 최고가와 비교하면 제일모직은 11%, 삼성물산은 29.2% 낮은 가격에 주당 합병가액이 결정됐고, 반대로 52주 최저가와 비교하면 제일모직의 합병가액은 41%, 삼성물산은 7.5% 각각 높다”고 분석했다. 두 회사의 주당 합병가액이 제일모직의 경우 최고가에 가깝게, 삼성물산은 반대로 최저가에 근접한 가격으로 결정된 셈이다. 덕분에 합병을 해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합병법인 지분율은 23.23%에서 16.4%로 7%가량 떨어지는 데 그친다.
제일모직이 지난해 느닷없이 상장발표를 한 이유도 이번에 드러났다. 상장과 함께 차기 후계의 핵심기업이라는 점을 활용하면 시장에서 엄청난 프리미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이 이 부회장의 프리미엄을 인정받기 전, 즉 외부전문가 평가가격인 상장 공모가로 합병한다면 합병비율은 삼성물산 주식 1주당 합병법인 주식 1.23주를 배정했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이 부회장의 합병법인 지분율은 23%에서 10% 초반으로 크게 떨어졌을 수 있다.
이번 합병으로 삼성물산의 경영권 방어 부담도 사라지게 됐다. 현재 삼성물산에 대한 삼성그룹 내부 지분율은 14.4%에 불과하다. 삼성물산은 최대주주의 낮은 지분율 때문에 한때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에 노출됐지만, 이번 합병으로 삼성그룹 내부 지분율은 40%에 달하게 된다.
#묘수2: 12조 원짜리를 8.8조 원에 사다
이번 합병의 최대효과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핵심계열사들을 삼성물산을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지배하게 됐다는 데 있다. 삼성물산이 5% 이상 의결권을 가진 계열사들은 삼성전자(4.1%), 삼성정밀화학(5.59%), 삼성SDS(17.08%), 삼성엔지니어링(7.81%) 등이다. 지난 1분기말 장부가(주가기준)만 12조 6771억 원에 달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서는 계열사 지분을 시장에 파는 게 제일 낫지만 그러면 삼성그룹 지배구조가 통째로 흔들린다”면서 “이번 합병으로 이 부회장은 합병법인 지분율을 7%포인트 정도 떨어뜨리는 대신 그룹 핵심인 계열사 지분을 사실상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물론 주식수로만 따지면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7.6%)이 삼성물산보다는 더 많다. 하지만 금산분리 규제 탓에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앞으로도 계속 보유하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삼성물산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은 이 같은 논란에서 자유롭다.
다만 일각에서는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서는 이번 합병이 이뤄지면 그룹 핵심계열사 지분을 낮은 값에 넘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현지시간) “삼성물산 주가가 지난해 23%나 하락해 기업가치가 낮은 상황”이라면서 “삼성 총수 일가에게 삼성물산이 상당히 중요한 만큼 주주들이 이번 합병안에 반대표를 던져 좀 더 유리한 새 합병조건을 이끌어 내려고 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상법상 합병 특별결의는 주주총회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삼성물산의 삼성 특수관계인 지분은 14.4%에 불과하다. 외국인 보유지분율은 34%에 달한다. 삼성물산의 주요 기관투자자로는 국민연금(9.8%)과 함께 대형 주식형펀드를 운용하는 미래에셋, 한국투신운용 등이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추진에도 공개적으로 반대했었고, 결국 두 회사의 합병은 매수청구권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무산됐다.
#묘수3: 지주사 강제전환 우려 없애 남매분할도 용이해져
현행법 상 자회사 지분가치가 총자산의 절반 이상이면 지주회사로 강제 전환해야 한다. 제일모직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 19.34%의 시가는 5월 26일 기준 4조 5240억 원으로 총자산의 절반이 넘는다. 다만 강제전환 규정을 적용하려면 자회사의 최대주주여야 한다. 삼성생명의 1대주주는 20.76%를 가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을 이 부회장이 상속 또는 증여받는 과정에서 상속·증여세를 현물대납(주식으로 세금을 냄)하게 되면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고, 이 경우 금융지주사로 강제전환될 위험이 있다. 현행법으로 금융지주사는 자회사인 금융회사를 통해 비금융자회사 지분을 가질 수 없다. 제일모직이 지주사로 강제 전환되면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을 처분해야 한다. 이 경우 삼성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이 15.3%에서 6.7%로 급락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합병으로 합병법인 삼성물산의 총자산은 40조 원에 육박하게 돼 지주회사 강제전환 우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이부진, 이서현 자매가 맡고 있는 유통부문의 ‘독립’ 가능성을 높인다. 합병 전이라면 사업부 분할로 총자산이 줄어들지만, 합병 후에는 두 사업부를 모두 떼어 내더라도 총자산이 30조 원을 넘게 된다.
증권가의 한 관계자는 “세 남매가 계속해서 합병 삼성물산을 통해 그룹을 공동지배 할 수는 없다. 결국 언젠가 이부진-이서현 자매가 보유한 합병 삼성물산 지분을 매개로 각자의 사업부를 떼어 내 독립하는 수순을 밟지 않겠느냐”라고 관측했다.
#묘수4: 순환출자 해소와 자회사 지배구조 재편 재시동
이번 합병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가장 큰 순환출자 고리는 유지된다.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삼성전기-합병 삼성물산’,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화재-합병 삼성물산’의 두 고리다. 삼성생명 자회사인 삼성화재, 삼성전자 자회사인 삼성전기와 삼성SDI의 합병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해야 순환출자 고리는 끊어진다. 하지만 그룹 지배구조 정점인 회사의 지분이다. 섣불리 시장에 내놓을 수는 없다. 합병 삼성물산이 그룹 지주사격인 까닭에 삼성 계열사 가운데 이 지분을 인수할 곳은 없다. 순환출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식 맞교환(swap) 또는 블록딜(block deal) 형태로 총수 일가 또는 우호세력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우선 전자의 경우 이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11.25%)과 맞교환이 가능하다. 이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 가치는 약 2조 5000억 원이다. 순환출자에 해당되는 삼성화재, 삼성전기, 삼성SDI의 합병 삼성물산 지분율은 각각 1.37%, 2.61%, 4.73%를 모두 합해 8.71%다. 합병 삼성물산의 시가총액이 30조 원만 돼도 삼성SDI의 지분가치는 약 2조 6000억 원이 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삼성SDS 지분은 현금화하면 헐값으로 인수한 주식으로 재산을 불렸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다른 계열사 지분과 맞교환하는 방안이 유력하다”라고 설명했다. 물론 그룹 외부 우호세력에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삼성에버랜드 시절 KCC에 지분을 매각한 전례도 있다. 이 부회장이 글로벌 인수합병(M&A) 전략을 펼치는 과정에서 제휴회사와 지분을 교차 소유하는 형태도 가능하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