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가운데)이 인천공항에서 카타르 도하발 항공기의 특별 검역 상황을 점검하는 모습. ‘마스크를 장려는 하지만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문 장관이 마스크를 착용한 사진이 공개돼 논란을 불렀다. 사진제공=보건복지부
국가원수 박근혜 대통령의 행보가 국민들에게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겼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일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메르스 같은 신종 감염병은 초기 대응이 중요한데, 초기 대응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특유의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유체이탈화법은 자신이 행정부 수반으로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관계없는 척, 모르는 척, 정부와 거리를 두는 책임 회피성 발언. 이는 ‘아, 모르겠다’라는 뜻의 인터넷 용어 ‘아몰랑’과 비슷하다는 지적과 함께 마침 오는 14일 미국 순방을 앞두고 있다는 점과 맞물려 ‘아몰랑, 미국 갈 거야’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1일 자신의 SNS에 “조선시대 평균 수준의 왕이었다면, ‘이게 다 과인이 미흡한 탓이오’라 했겠죠. 옛날 왕이 바이러스에는 무식했지만, 지도자의 도리에는 훨씬 유식했다. 지도자란, 질타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다”라고 박 대통령의 화법을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비교당하기도 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내 에볼라 환자가 단 한 명일 때 이미 비상대책회의를 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열흘 만에, 초기대응이 미흡했다고 사과도 해명도 아닌 ‘지적’을 한다. 제발 책임지고 비상대응을 하시라”고 꼬집었다. 정작 이 같은 박 대통령의 3인칭 화법은, 정부 시행령을 국회에서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게 하는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시사하며 1인칭 화법으로 돌변하면서 네티즌 등에게 더욱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제공=청와대
주관 부처인 보건복지부도 박 대통령의 ‘아몰랑 바이러스’에 전염된 모습을 보이며 공분을 샀다. 먼저 문형표 복지부 장관이 ‘마스크’로 호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지난 2일 문 장관은 ‘메르스 확산 방지 강화 대책’ 브리핑에서 “메르스뿐 아니라 마스크를 쓰는 것은 위생을 위해 장려한다. 그러나 메르스 때문에 추가적인 조치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 장관이 지난 5월 23일 메르스 확산방지를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해 카타르 도하발 항공기의 특별 검역상황을 점검할 당시 마스크를 착용한 사진이 공개되며 문 장관의 이중적인 태도가 논란이 됐다.
지난 5월 20일 “메르스는 전염성이 낮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파 가능성이 없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문 장관의 발언은 축구 황제 펠레의 ‘펠레의 저주’를 빗댄 ‘문형표의 저주’라고 까지 불리기도 했다. 그의 ‘안심’ 발언과는 달리 메르스 감염자와 격리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문 장관과 복지부의 안일한 인식으로 인한 초동 대응 실패는 큰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복지부의 메르스 예방 홍보 포스터.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에 개설된 ‘메르스 핫라인 콜센터’는 문의 전화가 폭주해 전화연결이 계속 지연되는 불편을 초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뒤늦게 핫라인 회선을 대폭 늘렸다. 메르스 핫라인은 질병관리본부가 기존에 에볼라 핫라인으로 사용하던 번호로, 정부는 발열·기침·호흡곤란·인후통·구토·설사 등 증상이 나타나 메르스 증상이 의심스러우면 보건소나 질병관리본부의 메르스 핫라인에 연락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메르스 바이러스 확산에는 늑장 대응을 하던 정부는 메르스 괴담 유포자 엄벌에는 발 빠르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한 시사평론가는 “지난해 에볼라 바이러스가 퍼질 때 아프리카 일부 나라들은 재빠른 대처로 피해를 최소화했다. 반면 우리의 괴담 유포자 색출, 엄정 대응 발표는 그 어떤 선진국보다 발 빨랐다”며 “괴담이 국민의 불안감을 조장한다는 생각 전에 정부가 정확하고 신속한 정보 공개를 통해 괴담이 끼어들 틈을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 정부는 국민 대다수가 메르스 환자 치료 병원 명단 공개를 원하고 있음에도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공개를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2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상자의 82.6%가 ‘메르스에 대비할 수 있도록 병원 공개를 해야한다’고 답했다”고 3일 밝혔다.
메르스 환자가 집중된 경기도 지역에서는 지역 정치인들이 비상 상황임에도 아랑곳 않고 해외연수 길에 올라 물의를 빚었다. 경기도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10명은 1명당 370만 원(개인 부담 120만 원 포함)을 들여 지난 2일 오전 8박 9일 일정으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3개국을 방문하는 연수 길에 올랐다. 일행 가운데는 도의회 사무처 수행 직원 4명, 도청 복지국 소속 간부 공무원 2명도 포함됐다.
여기엔 메르스 방역 담당 기관인 도 보건환경연구원과 도 복지재단 소속 직원도 각각 1명씩 동행했다. 보건복지위는 메르스 방역대책 업무를 담당하는 도 보건복지국 소관 상임위로, 도 보건당국의 행정을 파악하고 견제·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논란이 일자 이들은 남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4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급히 귀국했다.
또한 용인시의회 의원 7명도 6월 1일부터 10일까지 9박 10일의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한 가운데, 미국 방문단 중 한 새누리당 의원은 2일(현지 시각) 할리우드(Hollywood)에서 촬영한 여러 장의 사진을 자신의 SNS에 게시하면서 공분을 샀다. 해당 의원은 “LA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방문해 할리우드 영화의 절정을 경험하면서 동료 의원들과 한 컷”이라는 간단한 소개 글과 함께 10장의 사진을 첨부했다. 더욱이 이 게시글 아래 이 같은 시의원들의 행태를 꼬집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란”이라는 댓글이 달리자 이 의원은 되레 “감사합니다”라는 답을 남겨 논란을 키웠다. 이후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이 의원은 해당 게시물을 삭제했다.
메르스 환자와 밀접 접촉자로 자가 격리 중이던 서울의 한 50대 여성은 지난 2일 남편과 함께 규정을 어기고 집을 나와 전북 고창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지며 ‘골프장녀’로 등극했다. 보건당국에 의해 반나절 만에 자택으로 복귀하며 해프닝을 끝낸 이 여성은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갔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 자가 격리 생활수칙에 따르면 자가 격리 대상자는 2주간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생활해야 한다. 가족끼리도 얼굴을 맞대지 않고 마스크를 쓴 채 2m 이상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보건소는 무단 외출 등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두 차례씩 모니터링 전화를 하게 돼 있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