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승범이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서 웨이터로 출연한 장면에 ‘박찬호’ 이름을 그래픽 합성했다. | ||
여느 나이트클럽에서나 손쉽게 만날 수 있던 ‘조용필’ ‘박찬호’ 등의 이름표를 단 웨이터의 모습이 어쩌면 ‘지난날의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퍼블리시티권으로 인해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한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가명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웨이터들이 선정한 최고의 이름은 단연 ‘박찬호’다. 부상으로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던 지난 몇 년 동안에도 최고의 자리를 놓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재기에 성공한 올해 들어 더욱 주가를 높이고 있다. 최근 컨디션 난조로 부진에 빠진 박세리 역시 나이트클럽 웨이터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이름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웨이터들의 ‘이름 선호도’가 당시의 인기나 성적과는 별개임을 알 수 있다.
주요 손님층과 지역별로 선호하는 이름은 달라진다. 서울의 ‘변두리’에 해당되는 지역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사람 이름보다 사물 이름이 더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오십원’ ‘돼지’ ‘까치’ ‘주전자’ ‘뚜껑’ ‘초콜릿’ ‘호박’인 경우. 반면 강남권 나이트클럽에서는 인기 스타의 이름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연예인의 경우 그 이름만으로 ‘톱’이라고 꼽히는 이들은 드물다. ‘자신과 닮은 연예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게 요즘에는 웨이터들 사이에 크게 유행인데 이런 유행을 넘어서 확고한 인정을 받은 연예인은 아직 없다고. 반면 스포츠 스타 가운데는 박찬호와 박세리가 이런 경지에 올라있다.
또한 주요 고객층을 달리하는 성인나이트클럽에서는 나훈아 조용필 남진 태진아 등 중견 스타들의 이름을 자주 접할 수 있다.
특이한 사실은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박지성’은 아직 그 만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웨이터가 새로운 이름(가명)을 만드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라 고민을 거듭하게 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야 한다’는 점”이라는 게 이태원 소재 A나이트클럽 한 웨이터의 설명이다. 그는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지속성인데 아직 박지성은 웨이터들에게 지속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깜짝 스타’ 수준”이라고 덧붙인다.
반면 호스트바의 ‘선수’(호스트를 지칭하는 속어)들은 스타의 이름을 재밌게 변형하는 게 유행이다. 인기스타 장동건의 이름을 변형시킨 ‘잔돈건’이라는 가명이 인기를 얻고 있는데 그는 초이스를 앞둔 자기소개에서 동전을 던지며 ‘잔돈~건’이라 외친다고 한다.
웨이터들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이름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 따라 좋은 가명을 쓸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 먼저 그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임자가 된다”는 강남 소재의 B나이트클럽 웨이터는 “문제는 그 웨이터가 나이트클럽을 그만둘 경우인데 친한 사람에게 물려주거나 지배인에게 이름의 권리를 일임하곤 한다”고 얘기한다.
이름을 양도받은 지배인이 웨이터에게 해당 이름을 주는 조건은 역시 실적이다. ‘열심히 하는 웨이터’에게 그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얘기. 결국 웨이터의 가명이 좋다는 의미는 곧 단골손님이 많고 일을 잘 한다는 의미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예전에는 가명에 대한 권리금이 오가기도 했다는 점. 나이트클럽이 한창 호황을 누릴 당시에는 ‘박찬호’와 같이 좋은 이름은 권리금 받고 팔기도 했다고. 이는 단순한 이름값이 아닌 해당 웨이터의 단골손님을 그대로 이어 받는다는 의미가 더해진 권리금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금기시되는 이름은 무엇일까. 강북 소재의 C나이트클럽 웨이터는 “우리 사이에서는 ‘웨이터 이름에 따라 손님 성향이 결정된다’는 불문율이 있다”면서 “과거에는 ‘꼴통’ ‘또라이’ 와 같은 은어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러면 꼭 손님도 이름과 비슷한 이들이 많아 요즘엔 거의 쓰지 않고 있다”고 얘기한다.
강남의 유명 나이트클럽의 경우 웨이터가 가명으로 사용하는 실제 연예인이 손님으로 오는 경우도 발생하곤 한다. 그럴 경우 해당 연예인은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이태원 A나이트클럽의 한 웨이터는 “한번은 ‘정우성’이라는 가명을 쓰던 동료가 진짜 정우성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정우성이 ‘제 이름을 써주셔서 고마워요’라고 얘기하더라”며 “반면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은 몇몇 연예인들은 ‘왜 내 이름은 안 쓰느냐’며 장난 섞인 항의를 하곤 한다”고 전한다.
최근 국회의 퍼블리시티권 조항을 삽입한 저작권법 개정 움직임이 계속되자 웨이터 사회도 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웨이터들이 주장하는 가장 주요한 논지는 ‘해당 연예인만 문제 제기를 안 하면 문제될 게 없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우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해당 연예인이 웃으며 받아들이는 데 이를 법적으로 문제 삼으면 곤란하다는 것.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연예인 이름을 조금씩 바꾸는 방법이다. 요즘 이태원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웨이터 이름 가운데는 ‘장구경’이 있다. 언뜻 봐도 외국 연예인의 이름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는 이 이름이 ‘장’(나이트클럽 스테이지)을 ‘구경’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퍼블리시티권의 범주를 벗어나 보겠다는 것. ‘당나라’ ‘너훈아’ 등 과거 한 때 인기를 끌었던 변형된 스타 이름, 내지는 ‘장구경’과 같이 소리 나는 대로 쓴 스타 이름이 대세를 이루게 될 전망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웨이터가 인정하는 스타가 진정한 스타라는 점이다. 퍼블리시티권으로 인해 웨이터의 스타 이름쓰기 관행이 사라지기 전에 ‘박찬호’를 넘어설 수 있는 ‘웨이터 공인 국민스타’가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