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계관은 또 다른 세계관을 낳는 법이다. 만화 애호가들은 기존 창작물의 세계를 벗어나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해 낸다. 창조는 수수께기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이들은 이따금 ‘일반인 코스프레’를 해제하고 그들만의 은밀한 축제를 즐기기도 한다. 이른바 온리전(Only+展)이다.
지난 6일, 서울 강서구의 한 체육관은 ‘마블 온리전’을 참관하기 위한 인파로 북적였다.
“존잘님께서 ‘연성 있으라’ 하시니, 소비러 보시기에 좋았다.”
지난 6일 오후 1시. 서울 강서구 소재 한 실내체육관 앞은 ‘마블 온리전’ 참관을 위한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최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확산으로 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으나 기우에 불과했다. 이날 행사에 다녀간 이들은 주최 측 추산으로 1500여명. 한 주 전, 같은 장소에서는 ‘점프(일본의 슈에이샤가 발행하는 소년 만화 잡지) 온리전’이 열리기도 했다.
‘온리전’은 오직 하나의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는 뜻이다. 대개는 만화 동인들의 2차 창작물 판매를 위한 행사의 의미로 쓰인다. 이곳에서 팔리는 창작물은 흔히 ‘동인지’라고 부른다. 동인지는 특정 작품의 캐릭터와 기본 설정은 그대로 두되 새로운 플롯을 더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동인들의 이런 창작 활동을 흔히 ‘연성한다’라고 표현한다.
온리전은 ‘동인녀들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다. 이들이 연성을 즐기는 주제 가운데 BL(Boys Love), 동성애 코드가 메인 장르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연성의 사례는 영국 드라마 <셜록>의 두 주인공을 꼽을 수 있다. 아예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는 <셜록> 예고편을 두 남자 주인공이 썸타는 듯한 장면으로 편집해 큰 화제를 일으킨 바 있다. 국내에서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나 영화 <신세계> 등도 훌륭한 연성의 소재가 됐다.
기초 지식 점검이 끝났으니, 본격 현장을 둘러볼 차례다. 이날 1시 40분경, 기자가 받아든 대기 순번은 600번대, 같은 순번 100명 중 남자는 기자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 평소 성별에 관계없이 스스럼없이 소통해왔다 자부했건만 ‘9.8대 1’이라는 비과학적 성비 앞에서 의기소침해 질수밖에 없었다. ‘마블빠’임을 자인해 왔던 지난 세월은 다 부질없었고, 메르스 예방을 위해 착용한 마스크만이 위안이 됐다.
이후 40분가량 더 기다린 끝에 입장한 체육관은 100여개의 부스가 줄지어 있어 장관을 이뤘다. 행사는 이미 선예매를 통해 입장한 ‘얼리버드’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동인지는 특성상 소량 제작해 당일 판매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아 입장이 늦으면 원하는 작품을 구입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행사는 동성애가 주요 장르로 취급하다 보니 다소 수위가 높은 19금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다행히 미성년자 참관인에 대한 통제는 엄격했다. 입장부터 철저히 신분증이나 학생증을 요구했고, 대부분 부스에서는 샘플 열람조차 신분증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날 주최 측은 메르스 예방을 위해 입구에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구비했고, 판매자들에게 위생장갑 착용을 의무화했다. 부스 참가자 선정에서부터 장소 대관, 홈페이지 운영, SNS 홍보에 이르기까지 주최 측의 물 흐르듯 매끄러운 진행은 전문 이벤트 업체를 방불케 했다.
이날 기자가 얻은 물품들. 직접 구입한 동인지는 판매자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비공개 처리했다.
온리전은 ‘가성비’ 역시 뛰어난 편이었다. 입장료 4000원으로 주최 측이 준비한 종이백과 부채, 안내 팜플렛, 이벤트 책자 등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 이미 기자가 입장하기 전 매진이었다. 압권은 랜덤으로 지급되는 트레이딩 카드(트레카) 4종과 경품 응모권이었다. 경품은 스파이더맨 가면, 아이언맨 티셔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한정판 블루레이 등 다양했다. 기자는 한정판 블루레이 응모함을 선택했다. 과거 한 대형건설사 아파트 분양행사에 경품을 타기위해 방문했을 때의 기분이 재현됐다.
내친김에 직접 동인지 구입도 시도했다. 대부분 1만 원을 넘지 않는 얇은 분량의 소설이나 회지가 주를 이뤘는데, 생소한 용어들이 많아 접근부터 쉽지 않았다. 이때 국내에서 가장 친숙한 캐릭터인 아이언맨(토니 스타크)과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200여 페이지 분량의 ‘재록본’이었다. 판매자의 설명에 의하면, ‘재록본’이란 그간 출간했던 동인지를 모아 한데 엮어낸 책을 말하는데, 다년간 포기하지 않고 연성을 즐긴 ‘존잘(잘 쓰거나 그리는 이를 우러러 부르는 말)’만이 해낼 수 있는 경지인 셈이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낸 작품을 모은 이 책은 ‘할리퀸 로맨스’나 일본의 ‘라이트 노벨’을 본뜬 이야기 구성을 보였다. 19금 작품이 아니었던 관계로 몰래 감춰 봐야 할 수위의 묘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내년 개봉 예정의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를 볼때 자칫 또 다른 판타지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슬며시 들었다.
기자조차 탐났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인공 ‘스타 로드’ 등신대.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등신대 입찰’이었다. 입구에는 마블 캐릭터를 실물 크기의 배너를 만들어 전시해 놓았는데, 이날 20여종의 등신대가 ‘존잘 포스’를 뿜어냈다. 등신대는 온리전의 원활한 개최를 위해 동인들의 자발적 협력(재능기부)의 결과물이었다.
기자 역시 최고 아끼는 캐릭터인 ‘스타 로드’의 늠름한 자태에 입찰을 망설였으나, 당일 총알(현금) 부족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아이언맨이나 토르, 로키 등 인기 높은 캐릭터의 등신대는 상한가 30만 원을 가뿐히 넘기기도 했는데, 상한가 입찰이 나올 때마다 행사장 안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체육관 한쪽에서는 50여종의 트레카를 즉석에서 교환하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아 판을 벌였고, 일부 여성들은 직접 끌고 온 캐리어에 회지를 담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가진 근력을 초과해 구입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선택이었다. 일부는 주최 측이 준비한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온리전이 열리는 날은 동인녀들의 통장도 활짝 열린다. SNS 계정에서는 “10만 원 뽑아 와서 탕진. 점심값은 남을 줄 알았는데”, “다 털렸지만, 당분간 덕질 하며 버틸 수 있어 행복하다” “선입금에 현매, 통판(통신 판매)까지, 내 사전에 탈덕은 없다”와 같은 증언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둘러봤을 뿐이었지만, 온리전은 ‘가능성의 시장’처럼 느껴졌다. 90년대 이후 만화 출판 시장은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2차 창작은 어딘가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던 것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총망라한 서울코믹월드는 횟수로 130여회를 넘겼고, 최근 ‘온리전 전용 대관’이 생겨날 정도로 동인지에 대한 수요는 다양한 방면으로 분출되고 있다.
그만큼 어려움도 따른다. 개념이 생소해 대관 자체가 여의치 않다. 이를 빌미로 대관 측과 종종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SNS에서는 한 대관 담당자가 온리전 주최 측에 계약에 없는 추가금을 청소비 명목으로 요구하고, 주최 측 여성에 성희롱 발언을 일삼은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마블이나 점프 등 인기 캐릭터 위주로 수요가 몰리고 판이 커지면서 저작권법에 대한 우려도 상존한다. 과거 동인 활동을 했던 기자의 지인은 “동인 활동은 상업적인 것과 비상업적인 것이 불분명한 중간지대, 이른바 그레이존으로 분류된다. 수익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지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도 원치 않는다. 거길 기어이 갔느냐”고 책망하면서도 “동인 활동을 흑역사(지우고 싶은 과거)라고 비하하기도 하는데, 최근 대중문화에 스며든 브로맨스 열풍 등을 보면 사로잡아야 할 소비층임도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온리전, 그것은 은밀하고 위대한 창조경제의 현장이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