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전으로 치달을 것 같았던 전·현 정권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포착돼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11년 12월 22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지난 2월 초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통해 현 정부를 우회적으로 꼬집었다. 검찰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을 비롯한 자원외교 비리에 대해 대대적인 내사를 벌이고 있던 무렵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원외교는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친이계 인사들도 박근혜 대통령이 정국 전환용으로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며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당시 한 친이계 의원은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심경을 드러낸 것은 현 정부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친이계 결집을 노린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는 발끈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친이계가 박 대통령 ‘X파일’들을 폭로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던 터였다. 이완구 전 총리가 취임하자마자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사정당국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이른바 ‘대자방’(대기업·자원외교·방산비리)으로 불리는 건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수사하며 지난 정권을 옥죄어갔다. 서울중앙지검 고위인사는 “사실상 청와대를 컨트롤타워로 하는 수사였다.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정권 초부터 수집해왔던 지난 정권 관련 자료를 모두 꺼내 수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찰 내부에서조차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을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에 친이계 역시 격앙된 모습이 역력했다. 좌장격인 이재오 의원은 “이미 수사할 대상을 정한 기획수사다. 특정 정권을 제물 삼아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술수나 꼼수가 돼서는 안 된다. 검찰이 그 때 바로 부패를 잡아내야지 그 때는 가만 뒀다가 정권 바뀌면 (수사)한다. 그러니까 정치검찰이라는 말을 듣는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친이계 정병국 의원도 “문제가 있으면 수사하면 되지만 왜 그걸 담화를 하고 수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더러 분명 부메랑으로 돌아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친이계 내부에선 현 정권과의 전면전 주장이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자 친박계도 맞불을 놨다. 지난 4월 중순 사석에서 만난 한 친박 의원은 “(친이계가) 오해를 할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대응해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견해들이 많았다”면서 “전·현 정권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 살아있는 권력이 승리했다는 걸 친이계는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북송금 특검을 추진해 김대중 전 대통령 측근 박지원 의원을 구속시킨 바 있다. 광우병 정국으로 위기에 빠진 이명박 정부는 ‘박연차 게이트’를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하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 노림수는 분명했다. 친이계 ‘돈줄’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지난 정권 역점 사업인 자원외교와 대표적인 ‘친MB 기업’으로 꼽히는 포스코를 고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친이계의 거센 반발이 나온 후 그 강도는 더욱 세졌다. 친박으로서도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검찰이 이 전 대통령 일가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포스코 등에 대한 수사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검찰은 포스코 하청업체와 경남기업의 해외 자원사업과 관련해 이 전 대통령 측의 수상한 자금 흐름을 추적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강수에 친이계 스탠스도 변하기 시작했다. 임기 3년차의 현직 대통령과 맞서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감을 실감한 것이다. 사정 칼날이 비자금 저수지를 직접적으로 겨누자 결국 무릎을 꿇은 셈이다. 한 친박계 핵심 의원은 “처음엔 전쟁이라도 할 것 같았던 이 전 대통령 측에서 화해 제스처를 보내 왔다. 검찰 수사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몇몇 친박 관계자들이 논의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해당 의원이 지목한 이 전 대통령 측 인사는 “정치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오해를 푸는 차원이었다”고 간략히 답했다.
여권 핵심부도 주전파가 아닌 주화파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어갔다. 이 과정엔 전·현 정권 간 ‘핫라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정권의 경우 이 전 대통령 멘토 역할을 했던 종교인이, 현 정부에선 박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직 의원이 ‘메신저’로 은밀히 움직인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 대선캠프 출신의 원로 인사는 “둘 다 지금은 우리끼리 치고받을 때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들었다. 친박계 전직 의원이 일시적이나마 휴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고, 이를 들은 청와대 인사들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박 대통령에게까지도 이러한 내용이 보고된 것으로 안다”면서 “당분간은 양측이 조용하게 지낼 것”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친이계의 ‘SOS’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녹록지 않은 친박계 현 상황과 연관 지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이완구 전 총리가 비리와의 전쟁을 선포할 때만 해도 얼마나 기세가 등등했느냐. 그런데 성완종 파문이 엉뚱하게 대선자금으로 불똥이 튀었다. 또 4월 재보궐 선거 이후 당은 사실상 김무성 대표가 이끄는 비박계가 장악했다. 과연 여권 핵심부가 친이계와 전면전을 할 만한 동력이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집안 단속하기에 급급해 보인다”면서 “박 대통령으로선 친이계가 내민 손이 반가웠을 법도 하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