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지난 9일 서울 중구 대평로 서울시 메르스 대책본부를 방문, 현황보고를 듣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논의하고 있다. 사진제공=서울시
협력적 경쟁관계인 문 대표와 박 시장이 정국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선제적 공세’를 펴자, 당 내부에선 ‘All or nothing’(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게임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문재인)·안(안철수)’ 대결이었던 범야권 차기 대권 경쟁이 일단 ‘문(문재인)·박(박원순)’ 대결로도 다각화된 셈이다. 메르스 정국에서 문 대표와 박 시장이 치킨게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문재인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측근들 간 미묘한 갈등은 메르스 병원정보 공개를 둘러싼 논란에서 극에 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박 시장은 박근혜 정부가 메르스 병원정보 공개를 한사코 반대하던 지난 4일 오전 10시20분, ‘슈퍼쿨비즈 캠페인’ 행사를 전격 취소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갑작스러운 사정상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며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는 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 시각 문재인 대표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계 환경의 날’ 기념 탈핵행사 ‘잘 가라 노후원전’에서 원전 폐쇄를 촉구하며 노란 풍선을 날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문 대표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며 “우리는 그 사실을 세월호 참사 때 우리 국민들은 확인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이후 정부와 새누리당은 다시 거꾸로 가고 있다. 메르스에 대한 대응을 보면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고 박근혜 대통령을 정면 비판했다.
이후 문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장발장은행 개업식 ‘국회로 간 장발장‘에 참석, “벌금을 낼 돈이 없어서 교도소에 가서 강제노역을 받는 분이 해마다 4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우리 사회의 장발장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분들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실질적으로 법 앞의 국민들이 평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메르스 정국에서 정책행보를 고리로 박 대통령과의 ‘일대일’ 구도를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이날 오후 8시 4분께 문 대표 측은 “내일 경기도에서 메르스 현장대책회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기도청 지사실에서 새정치연합과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등이 메르스 현장대책회의를 열고 해법을 모색할 것이란 얘기였다. 이 시점까진 문 대표의 행보는 ‘연정(연합정치)’의 상징인 경기도와 함께 초당적 협력에 나선 ‘통합’에 방점이 찍혔다. 앞서 문 대표가 지난 3월에도 남 지사와 함께 ‘상생과 서민경제 살리기’를 주제로 간담회를 열며 합리적 보수층 끌어안기에 나선 바 있어 이 같은 관측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여의도 정가에선 “같은 당 소속인 서울시와 왜 먼저 하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1시간 20분 후, 박 시장 측이 메르스 확산 방지를 위한 ‘서울시 조치계획 긴급 브리핑’ 개최를 공지했다. 전격적인 승부수였다. 박 시장은 시청 브리핑룸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35번째 환자(A 씨)는 메르스 지역 확산과 직결된다”며 “(정부 대처와는 별개로) 행정력을 총동원해서 시민안전을 지키는 일에 집중하고 시 자체적으로 강력한 대책을 세워나갈 것”이라고 ‘초강수’를 뒀다.
메르스 정국은 ‘박(박근혜) vs 박(박원순)’ 구도로 급속히 재편됐다. 박 시장이 선제적 대응으로 발 빠른 행보를 하자, 보건복지부 등 정부당국은 물론 청와대도 메르스 관련 병원정보 공개에 나섰다. 광역자치단체장의 ‘신의 한 수’에 정부가 백기 투항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왔고, 어찌됐건 박 시장이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유도해 범정부적인 대책수립이 가능했었다는 측면도 있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박 시장이 메르스 사태에 적극 대처하는 모습으로 보이면서 차기 대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게 됐다”고 전망했다. 메르스 정국의 ‘최대 수혜주’는 박 대통령도, 문 대표, 남 지사도 아닌 박원순 시장이었다.
박 시장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일∼5일까지 5일간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대권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박 시장은 심야 브리핑 다음 날인 5일 일간 기준으로 전일 대비 3.3%포인트 상승한 14.8%를 기록했다. 반면 1위를 차지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23.3%)는 3일, 전일 대비 2.4%포인트 하락한 데 이어 4일과 5일에도 추가 하락했다. 문 대표의 사정도 비슷했다. 4일 19.6%까지 상승한 문 대표는 5일 17.6%로 급락했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0%포인트다.
친노 내부는 들끓었다. 당 복수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앞서 문 대표 측은 서울시에 ‘메르스 현장대책회의’ 개최 여부를 타진했다. 하지만 서울시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문 대표는 남 지사에게 SOS를 쳤다. 그러자 박 시장이 긴급 브리핑을 열었다는 것이다. 당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당과 상의 없이 혼자 메르스 대책을 주도하면서 오롯이 정국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꼴”이라고 비꼬았다. 범친노계의 한 관계자는 “박 시장이 문재인호가 흔들리는 상황이 되자, 한 발 치고 나가 친노계 내부를 흔들려는 게 아니냐”고 비판했다. 박 시장의 정무적 노림수에 문 대표가 걸려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박 시장으로서는 문 대표에게 자리를 깔아줄 필요가 없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결국 박 시장의 ‘독무대’가 펼쳐졌고 그곳에 야당의 수장은 보이지 않았다.
눈여겨볼 대목은 친노계 내부에서 박 시장을 둘러싼 시각이 계파 수장인 ‘상층부’와 계파 조직원인 ‘하층부’와 확연히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 대표는 “(정부당국의) 허술한 방역을 보완한 박 시장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박 시장을 칭찬했다. 당도 거들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 박 시장의 행보를 ‘대권을 위한 전략’으로 깎아내리자, 새정치연합은 “박 시장처럼만 하라”고 파상공세를 폈다.
문 대표는 이틀 뒤인 6일 기초단체장 협의회 메르스 대책관련 긴급총회를 연 데 이어 9일 서울시 메르스 대책본부 방문, “박 시장님을 뵈러 온 것이 아니라 박원순 서울시 방역대책본부장님을 뵈러 왔다”고 운을 뗀 뒤 “박 시장님이 정부와 지자체 간의 공조협력체계, 정보공유, 서울시 자체적으로 역학 조사를 할 수 있게 해줄 것과 서울시 산하 보건환경연구원에 확진 권한을 달라는 요구를 했고, 그것이 관철돼 더 효율적으로 방역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비노(비노무현) 성향인 야권의 한 전직 의원은 이와 관련해 “시장과 당이 같으니까 가능한 한 서로 상부상조하는 건 상식”이라며 “만일 (누군가) 당파적 차원으로 대응했다면, 국민들한테 환영을 못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비상시국에서 문 대표가 ‘통 큰’ 행보를 통해 당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대권 경쟁자 간 협력으로 야권 전체의 외연 확장을 꾀하게 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문 대표 역시 당 수습을 위한 전략적 행보라는 의미다. 당 한 관계자도 문 대표의 초당적 행보와 관련해 “정치인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메르스 정국에서 박 시장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문 대표도 계파 패권주의 등 당내 내홍이 완전히 수면 아래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당 일각에서는 문 대표가 박 시장의 메르스 행보에 대해 ‘립 서비스’를 한 것일 뿐, 본심은 자신과 상의하는 모습을 ‘연출’해주지 않은 박 시장에 대해 내심 섭섭해 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래서 이들이 장기간 협력적 관계를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차기 대권으로 가는 최대 관문인 20대 총선 공천권을 놓고도 ‘사즉생’의 싸움이 불가피해서다. 당 최대주주를 놓치지 않으려는 문 대표 측과 조직 구축을 통해 보완재를 확보하려는 박 시장 측의 싸움은 올 연말 차기 총선 공천권 다툼에서 극에 달할 전망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