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를 동시에 합격했다고 알려진 김 양의 놀라운 소식은 알고보니 철저한 거짓말이었다. 사진은 YTN 방송 캡처.
미국 교민신문 <워싱턴 중앙일보>의 전 아무개 객원기자는 지난해 12월 19일, 김 아무개 양의 소식을 처음 보도했다. 국내 굴지의 게임회사 간부의 딸이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로부터 조기 입학 제의를 받았다는 내용. 지난 6월 2일에는 더욱 놀라운 후속보도를 냈다. 김 양이 앞서 하버드대 합격에 이어 미국의 또 다른 명문인 스탠퍼드대로부터 장학금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입학제의를 받았다는 것.
당시 기사에 따르면, 김 양은 수학과 컴퓨터 분야에서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미국의 두 명문대 소속 교수들의 영입 경쟁 속에서 결국 두 학교에서 연이어 수학하게 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 양이 ‘페이스북’ 창업주인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만남을 제안 받았다는 일화까지 전해졌다.
당시만 해도 김 양의 이러한 놀라운 소식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아니, 국내 언론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김 양의 소식을 전하며 그의 천재성을 치켜세웠다. 김 양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스타가 됐고, 학부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또 한 명의 천재 탄생이었다. 김 양이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데에는 배경도 큰 몫을 했다. 아버지 김 씨는 현재 굴지의 게임회사 넥슨의 전무로 일하고 있다. 김 씨는 기업에 몸담기 전, <중앙일보>의 기자로 재직했던 언론인 출신이었다.
김 양이 미국에서 유학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김 씨가 지난 2008년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 나면서부터다. 당시 김 양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이후 실제 우수한 학업 성적을 거두며 현재 재학 중인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TJ)에 입학하게 됐다. TJ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과학계열의 특수목적 공립 고등학교로 알려졌다. 김 양의 소식을 최초로 보도한 전 기자 역시 아버지 김 씨의 언론사 후배였다.
김 양의 소식이 국내 언론사들에 의해 여과 없이 보도됐다. 김 양 스스로도 지난 5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두 명문대를 동시에 수학하게 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저 때문에 잠깐 특별한 케이스(동시입학)를 만들어 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며 “졸업장은 내가 나중에 선택할 수 있고, 아마도 하버드 졸업장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며칠 뒤 뜻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내 한인사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김 양의 두 명문대 합격 소식을 두고 조작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만 해도, 국내에선 ‘설마’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속 좁은 일부 이웃들의 시기심이나 질투쯤으로 여겼다.
위조된 것으로 드러난 김 양의 하버드대 입학 통지서.
리사 라핀 스탠퍼드대 대외홍보담당 부총장 역시 “김 양 측이 공개한 스탠퍼드 합격증은 위조됐다”라고 밝혔다. 라핀 부총장은 “스탠퍼드와 하버드 양측에서 수학한 뒤 졸업장을 어느 한쪽에서 받는 조건으로 입학하는 특별 전형은 우리 대학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김 양이 주장한 두 학교 동시 수학 과정 자체를 부정했다.
해당 보도 직후, 김 양의 아버지 김씨는 “두 대학의 합격증이 위조되었을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해당 교수와 주고받은 메일도 공개할 용의가 있다”며 “추후 변호사와 상의해 대응하겠다”고 김 양의 합격증 조작 의혹을 일축했다.
하지만 김 양이 제공한 메일 역시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고, 그를 둘러싼 의혹은 점점 사실로 굳어졌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선 김 양의 동급생이라고 주장하는 한 네티즌의 폭로성 글도 올라왔다. 이 글은 번역을 거쳐 국내 각종 커뮤니티에 도배가 됐다.
해당 글에 따르면, 김 양은 지난해 미국 수학경시대회 학교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친구의 합격증을 도용한 뒤 마치 자신이 합격한 것처럼 꾸며 주변에 알렸다고 한다. 또한 김 양은 얼마 후 하버드대 조기입학 전형서 탈락하고도 자신의 합격을 주장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듯 하버드와 스탠퍼드대 합격생 모임을 찾아가서 진짜 합격생들과 사진을 찍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 글의 요지다. 한 마디로 김 양의 허언증적 행동이 반복돼왔다는 주장인 셈이다. 해당 글의 진위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를 최초 보도한 앞서의 전 기자는 지난 10일, <미디어오늘>을 통해 “합격 대학과 교수 등에게 사실 확인을 끝까지 하지 않은 우를 범해 사실과 다른 보도를 하게 됐다”고 오보를 인정하면서 “김 양을 제가 알고 지낸 것은 벌써 몇 년째 되었으며 아주 영특한 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교수들과 주고받은 이메일들도 구체적이어서 확신이 들었다. 지금도 허위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채널A의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 인터뷰 방송 캡처. 김 양측 주장을 부인했다.
최초로 보도한 기자까지 오보를 인정한 마당에 김 양 측 역시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김 씨는 11일 현지 특파원들에게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죄송하다”라는 사과의 취지를 담은 입장자료를 돌렸다.
김 양의 행태에 대해 한 정신과 전문의는 “성격장애라고 진단내리기엔 김 양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면서도 “허언증이나 병적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좋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면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서 주로 보이는 증상이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한 소녀의 입에서 시작된 이번 미국 명문대 동시 합격 조작 소동은 결국 ‘학력지상주의’라는 병폐 속에서 씁쓸한 뒷맛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폭풍은 만만찮아 보인다. 일단 이번 소동과 관련해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김 양의 소식을 최초 보도한 전 기자가 미국 현지서 입학 컨설팅업을 겸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도성’ 여부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일각에선 ‘입학 컨설팅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가가 어떻게 김 양의 조작 행위를 모를 수 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애초 이를 이용해 한국 명문대의 특별전형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덧붙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이러한 의혹에 대해 김 양 측은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