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병들은 유해의 DNA 오염 방지를 위해 더운 날씨에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붓을 이용해 흙을 걷어내는 등 조심스럽게 작업을 한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장미산이 발굴 지역이 된 데에는 인근 어르신들의 제보 덕이 컸다. 전쟁사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전사자들의 위치를 찾는 가장 정확한 정보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나 동네 주민들의 기억이다. 동네 주민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사상자가 속출했다”며 “장미산 일대로 가보라”고 했다.
장미산에서 첫 삽을 뜬 지 일주일 되던 지난 16일, 마침내 전사자의 전투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날인 17일 <일요신문>이 찾은 발굴현장에는 ‘출입금지’ 라인이 설치돼 있었다. 30℃ 가까운 날씨에도 전문 발굴병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유해발굴감식단 신필순 발굴과장(육군 중령)은 “행여나 침이 튀면 DNA 검사가 잘 되지 않는다. 출입금지 바인드를 설치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이유”라며 “이미 나무뿌리가 파고들어온 유해의 경우 바스라지기 쉽기 때문에 붓을 이용해 발굴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발굴병들은 붓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전날 발견된 전투화는 윗부분이 부식돼 사라진 상태였다. 밑창만 남은 전투화 위에는 발가락뼈가 있었다. 일대를 확장해나갔다. 50㎝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전투화가 발견됐다. 조심스럽게 들어 확인한 전투화의 밑창은 물결문양의 아군 전투화 밑창과 달리 동그란 홈이 10개가 보였다. 당시 북한군이 신었던 전투화다. 격전지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다 경사 밑으로 나뒹굴었을 아군과 적군의 모습이 그려졌다.
유해발굴감식단원들은 발굴이 시작되면 통상 1개 지역에서 4~6주를 머무른다. 이 때문에 해당 지역 부대 생활관 및 24인용 천막에서 약 8개월간 생활한다.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유해발굴감식단 배대장 팀장(상사)도 일주일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간 9시에서 17시까지 산을 타고 오르내리길 수십 번, 유해가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그간의 고생이 다 잊힌다. 배 팀장은 “하루에 한 분이라도 모셨으면 하는 생각을 늘 한다. 유해가 나오지 않으면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전쟁사도 더 찾아보고, 다른 팀장에게 자문도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발견된 유해는 두개골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드러나는 완전 유해가 아닌 뼈 일부만 드러난 부분 유해였다. 즉, 주변으로 유해가 더 나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최초 전투화가 식별된 곳을 기점으로 일대를 확장해나갔다. 곧 크기가 다른 뒤꿈치뼈 2개가 나왔다. 종아리뼈와 아래턱뼈, 두개골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잉크병도 함께 발견됐다. 국군이 잉크를 사용했을 확률은 희박했다. 현장에서는 미군과 북한군일 것이라는 정도까지만 추정이 가능했다. 정밀 감식은 이제 중앙감식단의 몫이다.
전사자의 밑창만 남은 전투화. 뼈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일대를 확장해 나간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배대장 팀장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피아식별은 유품으로 한다. 발견된 전사자가 또 다른 전사자의 전투화를 벗겨 신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전투화는 피아식별을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가장 좋은 것은 군번줄과 같은 인식표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에는 군번줄을 착용한 국군이 거의 없었다”며 “이 현장은 아군의 전투화와 적군의 전투화가 발견됐고, 아군으로 추정되는 유해의 기골이 장대하며 잉크병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미군과 북한군의 유해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지금까지 무려 8477구의 전사자 유해를 발굴했다. 8개의 발굴단이 대한민국 전국 각지에서 유해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발굴지역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조사과가 전투기록 등 전쟁사 연구와 주민들의 증언을 참고해 선정한다.
하지만 전쟁사를 아무리 뒤져봤자 전사자의 위치는 쓰여 있지 않다. 조사관과 탐문관이 전국을 다니며 전투 흔적이 있는지 탐사하는 수밖에 없다. 나무 밑에 움푹 파인 개인호 흔적이 있으면 금속 탐지기를 대보기도 하고 삽으로 파헤쳐 보기도 한다. 대략 1000개의 개인호 추정 구덩이를 파면 1구 정도의 유해가 발굴된다.
이렇게 발견된 유해는 수습에 들어간다. 유해는 하나하나 한지로 포장된다. 포장된 유해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소관으로 옮겨진다. 국군전사자는 태극기로 관을 포장한다. 포장된 유해는 간단한 약식제례를 거친 다음 임시보관소에서 중앙감식단이 DNA 채취를 시작해 정밀감식에 들어간다. 이렇게 국군 전사자는 8477구가 확인됐다. 그중 107기만이 유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신필순 과장은 “각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 중 미군 유해는 미국 측에 인계된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는 파주에 있는 이른바 ‘적군묘지’에 안장된다”고 말했다.
유해발굴감식단에게는 발굴 현장이 전장이나 다름없다. 목표는 현재 13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 국군 전사자를 마지막 한 명까지 찾아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 신 과장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고령화되면서 기억이 흐려지고, 산천 개발 등으로 유해가 유실되는 경우도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가족의 DNA 등록도 3만 건에 불과하다”며 “발굴되는 유해 수에 비해 유족과 연결되는 경우도 적다. 유해발굴단은 전사자 직계가족, 8촌 이내의 유전자 샘플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기동팀을 운용하고 있다. 요즘에는 타액으로도 DNA 등록이 가능하다. 가까운 보건소를 찾아도 된다. 국민들이 DNA 검사에 참여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평창=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장병들 국가관 면접 등 엄선 현재는 해체된 미국포로 및 실종자확인사령부(JPAC)는 “단 한 명의 전우도 전장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목표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미군의 유해를 추적했다. 지금도 신설부처가 JPAC이 했던 미군유해발굴과 감식작업을 넘겨받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전사자 유해 발굴 전문부대는 미국과 한국이 유일하다. 국군전사자의 유해가 담긴 관은 태극기로 포장한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약식제례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당초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은 지난 2000년, 육군이 전쟁 당시 경북 칠곡 ‘다부동 전투’ 전사자의 유해 발굴을 추진하면서 시작된 한시적인 기념사업이었다. 주 임무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호국용사의 유해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사업이 호응을 얻으면서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정식으로 창설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병사 및 간부는 육·해·공군을 비롯해 특전사까지 200여 명의 장병으로 구성돼있다. 산악지대를 수색하는 발굴과의 발굴병, DNA 감식을 하는 감식병은 모두 입대 전 지원을 통해 선발한다. 유해발굴감식단 정예원 홍보관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인 만큼 유해발굴 감식병은 의학 방사선학 생물학 등 관련 전공자를, 유해발굴병 또한 고고학 사학 등 전공자를 면접을 통해 선발한다”며 “지난해 경쟁률이 각각 3.8 : 1(감식병) 4.14 : 1(발굴병)에 이를 정도로 호응도 높은 편이다. 1000m 고지를 매일 올라야 하는 고달픈 일이기에 면접시 국가관 등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물어 엄선한다”고 말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