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 거부권 사태를 두고 불거진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론에 대해 다수의 친박 의원들이 ‘침묵 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친박계 의원들이 6월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가경쟁력 강화포럼 세미나를 열고 ‘국회법 개정안 위헌논란’을 주제로 한 제정부 법제처장의 강의를 경청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친박계 핵심 멤버인 한 3선 의원은 “솔직히 이젠 친박이라고 하기도 뭣 할 정도로 친박한다는 사람이 없다. 당내 뭐 친박의 구심이 있어야 모이기도 하고 작전도 짜고 힘도 내고 하지, 지금은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며 “어제 국무회의에서 우리 대통령이 말한 것은 그냥 유승민하고 전화로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도 있었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온 국민이 다 듣는 데서 여당의 원내대표를 그리 뭉개면 당장은 속시원할지 몰라도 국민이 정치를 더 우습게 알게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친박 중진으로서 ‘유승민 사퇴’를 이야기할 것이란 예상이 깨졌다. 친박 내부에서도 이처럼 대통령의 강경 일변도 정국운영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재선의 친박 한 의원도 “당에서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해서 의결할까봐 사전포석을 둔 것 아닐까”라고 했다. 그의 해석은 이랬다.
“대통령이 코너에 많이 몰렸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원래 코너에 몰렸을 때 이빨을 드러내고 물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닌가. 자신 있으면 웃으면서 지켜보는 것이 이곳 생리다. 유승민이 국회가 정치의 중심에 서겠다고 원내대표 경선에서 밝혔고 우리가 찍었는데 대통령의 오늘 발언은 ‘정치는 우리가 한다. 국회가 한다는 것은 하극상’이라고 경고한 것과 같다. 당장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를, 또 여당을 이렇게 망신 줘선 안 되는 거였다.”
일부 강경 친박그룹이 의총 등에서 유승민 사퇴 등을 언급하며 분위기를 냈지만 실제 친박 내부 분위기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통령의 ‘배신 정치’ 언급 등에 대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다수다. 한 초선 의원은 “박 대통령이 당 비상대책위원장 할 때 공천을 받았으니 나도 사실상 친박이라 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국민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농촌은 가뭄, 상인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쑥 빠진 매상 걱정에 한창이고 사실 국회법은 안중에 없다”며 “대통령이 악화하는 여론을 달래려 목표를 여의도로 잡은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고 다소 격앙된 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배신의 정치’를 말한 대통령에게 용감하게 박수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경제민주화, 복지, 경제살리기…우리도 말해온 것이지만 작금의 정치상황을 봤을 때 (국회가 배신했다, 유승민이 배신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일부 친박은 유 원내대표의 스탠스를 두고 다소 놀란 표정이다.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다음날 유 원내대표가 수차례 “사죄한다”는 표현을 쓰며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 한 소식통은 “친박에선 유승민의 스타일상 재의결시키고 물러날 수도 있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가 고개를 숙이는, 어떤 유연함을 취한 것에 충격 받은 모습”이라며 “대통령으로서도 유승민이 저렇게 저자세로, 로우키(low-key)로 가는데 한번 더 목조를 수 있겠는가. 앞으로 다른 구실을 또 찾겠지”라고 전망했다.
일부 친박은 이른 시일 내 빨리 모여 대통령의 진짜 의중을 살펴보자는 이야기도 꺼냈다. 그래야 어떤 행동이든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박의 또 다른 중진 의원은 “워낙 예전부터 일부가 ‘이것이 대통령 생각이야’라며 ‘박심 사기’를 쳐서 우리도 그들의 말은 반만 믿고 반은 믿지 않게 됐다”며 “서청원이든 최경환이든 구심 역할을 제대로 하고 곧 모여 이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논의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정가에선 ‘모래알 친박’이라 말들 한다. 아무리 쥐어도 빠지는 모래알이 친박의 결속력과 닮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친이계는 결집하고 또 확장해서 대통령을 만들었는데, 박근혜 대통령(당시는 국회의원)에 기대서 정치생명을 연장해 온 친박은 자생력도 없고 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각은 친박계가 단체행동에 나서도 별 효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예측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이런 무기력한 여당 상황 속에서 대통령의 핏대 높인 꾸중은 오히려 공허하게 들린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