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최재성 의원이 6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친노 필패론’에 시달리는 문재인 대표의 2·8 전국대의원대회 출마가 19대 대선을 위한 ‘임시정거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 주류세력이 20대 총선 지분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친노계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애초 문 대표의 당직 인선 구상에는 ‘최재성 카드’가 들어있었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최 의원이 개혁공천의 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 의원의 강점으로 △추진력 △전략통 △친화력 등을 꼽았다. ‘사즉생’의 각오로 임할 수밖에 없는 20대 총선을 이끌 최적임자라는 의미다.
다만 486그룹 맏형격인 강성 이미지 탓에 의원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리는 점은 약점으로 꼽힌다. 비노계 한 당직자는 ‘최재성 카드’와 관련해 “친노 패권주의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는 게 아니냐”며 “계파(친노 vs 비노) 갈등은 물론 향후 노선(진보 vs 중도) 투쟁이 격화될 것이다. 친노가 이래도 되느냐. 지금 당은 폭발 직전”이라고 분개했다.
실제 지난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9일간 사투를 벌인 친노계와 비노계의 싸움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29 재·보궐선거 패배 이후 △지도부 책임론 △계파 갈등 △지지율 하락 등 ‘삼중고’에 휩싸인 친노계도 비노계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최재성 카드’가 테이블에 올려진 것은 지난 14일 당 심야 최고위원회의였다. 문 대표는 이 자리에서 ‘최재성 카드’ 강행 의사를 밝혔다. 정세균계인 정병헌·오영식 최고위원 등도 힘을 실었다.
비노계 내부는 폭발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를 필두로 이석현 국회 부의장, 중진인 유인태 의원 등이 문 대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 원내대표는 문 대표를 직접 향해 “당 안쪽에 열쇠를 잠갔다”며 “분열정치를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반격했다. 양측 간 제로섬 게임의 신호탄을 알린 결정적 장면이다. 당직 인선이 하루하루 미뤄지는 사이, 문 대표는 ‘플랜 A’ 대신 ‘최재성 전략홍보본부장’, 비노계는 ‘노영민(친노계)·우윤근(범친노계)·김동철(손학규계)’ 중 한 명을 사무총장으로 인선하는 ‘플랜 B’를 역 제안했다.
양측 간 수싸움은 계속됐다. 이 원내대표가 “최재성 카드를 포기한 것 같다”고 하자, 문 대표는 최재성과 ‘노영민·우윤근·김동철’ 조합에 대해 당사자들의 동의를 전제로 수락하겠다고 응수했다. 하지만 최 의원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9일간 버틴 문 대표는 이 원내대표에게 전화로 당직 인선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원내대표 측은 “최고위 의결 전 발표할 수 있느냐”고 반발했다. 비노 내부에서도 “당을 깨자는 것이냐”라며 격한 반응이 나왔다. 애초 박기춘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추천한 박지원 의원은 6월 24일 “최재성 임명은 특정 계파의 독점 신호탄”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 의원은 같은 날 당무 거부에 돌입한 이 원내대표, 주승용 최고위원과 함께 국회에서 긴급 회동을 가졌다. 김한길 전 공동대표와 최재천 의원도 회동하고 대응 마련에 나섰다.
친노계 한 관계자는 문 대표의 행보와 관련해 “취임 100일 시점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후 상황을 눈여겨보라”고 귀띔했다. 문 대표는 ‘호남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고 가지 않겠다는 일관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실제 그랬다. 4·29 재보선 패배를 기점으로 비노계인 ‘김한길·박지원’ 의원 등이 계파 패권주의 논란에 화룡점정을 하자 문 대표는 ‘초계파’ 혁신기구 구성을 전격 제안했다. 하지만 비노계는 “시간벌기 꼼수”라고 평가절하한 뒤 문 대표의 비선조직으로 알려진 ‘삼철’(전해철 의원·이호철 전 민정수석·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 논란에 불을 지폈다.
문 대표와 대립각을 세운 이종걸 원내대표, 이석현 국회 부의장, 유인태 의원(왼쪽부터 차례대로).
문 대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일 전, 비노계를 ‘공천 지분을 요구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한 입장 발표문을 내려다가 취소했다. 당 중도모임인 ‘민집모’(민주당 집권을 위한 모임) 소속 의원들과 오찬 간담회를 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전북의 유성엽 의원은 이 자리에서 공천 지분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문 대표는 ‘당원에게 드리는 글’이란 제목의 입장 발표문에서 “기득권과 공천 지분을 지키기 위해 당과 지도부를 흔드는 사람들의 부당한 ‘지분 나눠먹기’ 요구에는 타협하지 않겠다. 굴복하지 않겠다”고 강경 의지를 드러냈다. 사실상 호남 세력을 차기 총선 공천권을 요구하는 집단으로 규정한 셈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문 대표 발언에 대해 “호남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이른바 ‘탕평의 탈’을 쓴 공천 나누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노계 의원도 “총선 공천권은 당원과 국민들의 몫이지, 계파 간 나눠먹기가 아니다”라며 “이른바 ‘6 대 4’ 등을 요구하는 비노 요구에 동의할 수 없다. 공천의 숫자 배분은 그야말로 구태정치 중의 구태다. 문 대표 의중에 차기 대선 출마보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정치개혁을 잇겠다는 뜻이 강한 게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수였던 열린우리당 창당의 명분인 ‘전국정당화’와 맥을 같이하는 지점이다. 문 대표가 ‘최재성 카드’로 ‘개혁 공천→호남 물갈이→새 피 수혈 등 신진 인재영입’ 등 열린우리당 2기 구축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 대표는 당 대표 취임 이후에도 측근들에게 “나는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불합리·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비노계인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되자 이 공간을 치고 들어가 결집력 약한 비주류를 뒤흔들었다. 비노계가 섣불리 신당 창당에 나설 수 없다는 자신감도 문 대표가 승부수를 던진 이유로 보인다.
문제는 문 대표가 ‘노무현 그림자’에 갇히면서 당의 원심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제1야당의 대표가 혁신 작업 과정에서 통합적 리더십 대신 갈등 지향적 리더십을 택하는 엇박자 행보를 내자, ‘자파 이기주의’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당이 깨지든 말든 ‘친노 구하기’에 나서면서 패권정치를 자초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1996년 총선 전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체재였던 이기택 민주당 총재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전망을 한다. 1996년 총선 직전 당시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은 끝내 한 배를 타지 못하고 분열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1992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뒤 야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이기택은 동교동계를 끌어안기는커녕 계파 지분에 매몰돼 ‘측근 심기’에 나섰다가 역풍을 맞은 바 있다.
비노계 한 관계자는 “친노 패권주의 얘기만 나오면, ‘호남 물갈이’론으로 맞서면서 당을 ‘친노 vs 호남’ 구도로 이끌고 있다. 호남만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호남 없이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범 친노계 인사는 “비노의 ‘문재인 흔들기’가 도를 넘고 있다”고 반박했다. 문재인호의 ‘친노 vs 호남’ 갈등은 이제 시작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