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 조부모 육아교실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제공=내손주닷컴
‘송이 할머니’ 김신숙 씨(63)는 전국으로 나들이를 다닌다. 몇 년 전 우연히 들른 백화점에서 당시 네 살이었던 손녀가 영국 아이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입소문을 타면서 방송출연과 강의 제의가 이어진 것이다. 김 씨는 요즘도 손녀를 기르며 터득한 영어 교육법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바쁜 황혼을 보내고 있다. 손녀를 기르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생 2막’이다.
김 씨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딸이 결혼해 이듬해 손녀를 낳았다. 이른 나이에 할머니가 된 셈이다. 대학원생이었던 사위와 학부를 마쳐야 하는 딸을 대신해 손녀를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는 누구보다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손녀에게 일찍 영어를 가르쳐보면 어떻겠냐고 딸과 의논했다. 딸은 김 씨의 도전을 응원했다.
김 씨는 “나는 ABCD 정도만 아는 할머니였다. 손녀에게 영어 동요 테이프를 습관처럼 들려주면서 나도 고등학교 때 배운 기억을 더듬어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됐다”며 “영어책과 영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사전을 보고 영어발음을 적어내느라 한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초보 시절을 회상했다. 김 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손녀는 6세부터 간단한 동시통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김 씨는 하루에 한 시간씩 산책을 하거나 맨손체조를 하며 체력관리에도 신경 썼다. 황혼육아를 하면서 체력 문제로 애를 먹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퀼트와 같은 취미생활을 하며 자기시간을 가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존감을 잃지 않아야 손녀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다. 손녀가 중학생이 되어 부모와 함께 인천에서 살게 된 사이 김 씨는 <시골 할머니의 영어짱 손녀 만들기>라는 책을 출판하고, 전국에서 강의를 하는 유명인사가 됐다.
김 씨는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아이들은 되레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더 크다. 지혜와 경험을 가진 조부모는 아이가 잘못했을 때 화를 내기보다 아이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뜻대로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다만, 큰 결정의 주체는 딸이나 며느리, 즉 부모가 돼야 한다. 어찌됐든 육아의 중심은 할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즘 할마 할빠들은 ‘잘 놀아주는 방법’ ‘대화하는 방법’ ‘아이 정서 이해하기’ 등에도 관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사진제공=내손주닷컴
할마 할빠들은 김 씨처럼 육아를 자기계발의 기회로 삼기도 하고, 블로그에 육아일기를 쓰며 소통하기도 한다. 내 손주를 좀 더 잘 기르기 위해 육아교실의 문을 두드리거나 육아 사교육을 받는 할마 할빠들도 등장했다. 이에 발 맞춰 지방자치단체나 보건소를 중심으로 조부모 육아교실이나 특강이 많아졌다.
내손주닷컴 유주희 대표는 “외국의 경우 격대 세대가 재미있게 놀고 선물도 교환하는 날이 있다. 이에 착안해 경북지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날’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름이 너무 길어 전문가에게 적절한 단어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때부터 할마 할빠 단어가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는 “과거 황혼육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 할마 할빠들은 굉장히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육아교실이나 특강의 문을 두드리는 조부모의 경우 손주를 떠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손주를 키운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며 “옷 잘 입히고, 잘 먹이는 것 외에 ‘잘 놀아주는 방법’, ‘대화하는 방법’, ‘아이 정서 이해하기’ 등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것이 요즘 할마 할빠들의 특징이다. 어떤 분은 손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공부를 하며 육아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모두가 황혼육아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는 것은 아니다. 권 아무개 씨(여·59)는 일하는 딸을 대신해 세 살 난 손자를 대신 봐주고 있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 육아를 떠넘기는 딸을 볼 때면 섭섭함이 밀려온다.
권 씨는 얼마 전 딸에게 더 이상 육아를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루는 너무 바빠 밖에서 사온 김밥을 손자에게 먹였는데 저녁에 이를 본 딸이 ‘왜 밖에서 파는 음식을 아이에게 먹이느냐’며 역정을 냈기 때문이다. 손자를 돌보면서부터 장을 보는 금액도 늘어났지만 한 번도 용돈을 챙겨주지 않던 딸에게 처음으로 섭섭함을 표했다. 그날 권 씨는 그동안 아이에게 쓴 돈이라고 딸에게 영수증을 보여주며 ‘너 때문에 밥 먹고 있는 손자까지 예뻐 보이지 않았다’며 모진 말을 쏟아냈다.
권 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육아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육아를 떠맡았다는 자격지심에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경우다. 이러한 자존감 저하는 곧바로 아이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 입장에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상황을 진단해 봐야 한다.
황혼육아의 대부분은 갈등은 ‘너무 당연시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할마 할빠들을 위한 육아교실이나 특강에서는 ‘아이 부모와 대화하는 법’, ‘육아 기준 정하기’ 등과 관련한 내용들을 강조해 설명한다.
유 대표는 “황혼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육아는 저녁 7시까지, 평일에만, 야근시 미리 이야기할 것 등 기준과 시간을 정해두는 것이 좋다. 육아방법에서 아이 부모와 의견차가 생기면 최종 결정은 아이 부모에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아이의 부모들도 아이를 맡길 때 너무 당연시 하거나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며 “할마 할빠들의 경험과 이론이 합쳐지면 그만큼 좋은 육아방법도 없다. 미리 준비하고 공부하면 황혼육아는 100세 시대에 나의 삶의 풍요롭게 해주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강남 슈퍼 그랜드맘들은… 월 40만~80만 ‘육아 과외’ 열풍 현재 황혼육아를 맡은 할마 할빠들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대부분이다. 특히 50대의 베이비부머 세대 할마 할빠들의 평균 자산은 4억 3000만 원으로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튼튼한 자산을 바탕으로 은퇴 후 노후생활에 접어든 베이비부머 세대 할마 할빠들은 맞벌이 부부들에게 가장 든든한 육아 지원군이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할마 할빠들은 좀 더 나은 손주 양육을 위해 육아 사교육을 받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육아 과외’나 ‘육아 스터디’로 불리는 육아 사교육은 젊은 엄마가 많은 서울 마포지역이나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는 조부모들이 모인 강남권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강사의 이력이나 강의 내용에 따라 과외비가 달라지지만 보통 수강료는 월 40만 원에서 80만 원 사이를 오간다. 강남지역에서 조부모 육아 스터디 모임 강사를 하는 A 씨는 “육아 스터디는 보통 10명 내외로 이뤄진다. 대부분 엄마들이 알아봐주고 조부모님들이 참여하는 형식”이라며 “강남 조부모들이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즐기며 여행만 다닐 것 같지만 육아 과외에 참여하는 할마 할빠 중 가장 적극적이다. 어린이집 보내기 전에까지는 ‘내가 아이 키운다’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해 육아 공부를 한다”고 설명했다. 조부모 육아 스터디 모임에서는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마사지 방법이나,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음식과 동요 등 교과과정이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된다. 아이들이 성장할 때마다 교육법이 달라지는 ‘맞춤 과외’를 해주는 것도 육아 사교육의 특징이다. 단발성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할마 할빠들 사이 정보교류도 활발하고 친목모임 성격도 뚜렷하다. A 씨는 “강남 할마 할빠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육아 사교육에 적극적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일단 강남 서초구 같은 경우 구청에서 지원하는 조부모 육아수당이 있다”면서 “또 다른 이유 하나는 강남 할마 할빠들의 경제력이다. 강남 할마 할빠들은 손주 육아를 하면 집안일은 하지 않는다. 육아를 본인이 하는 대신 집안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 보니 더욱 육아 과외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고 귀띔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