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엘리엇의 삼성물산이 저평가 됐다는 주장에 맞서 제일모직의 유망한 기업가치를 내세우며 역공을 펼치고 있지만 여전히 판세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삼성의 적극적인 대응의 이면에는 이번 주총에서의 승부를 여전히 자신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엿보인다. 패한다면 후계구도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물론 향후 헤지펀드들의 경영간섭이 노골화될 수 있다는 절박감이 그 배경이라는 분석이다.
지난 1일 서울중앙지법은 엘리엇 측이 낸 주총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줬고, KCC로 넘어간 자사주의결권 효력정지 가처분소송은 판단을 유보했다. 일단 주총은 그대로 열리게 됐고, 현재 상태면 KCC로 넘어간 자사주도 의결권 행사는 가능하다.
같은 날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인천 송도 바이오캠퍼스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삼성의 바이오 생산설비는 이날 최초로 외부에 공개됐다. 특히 삼성에서 최고경영자가 직접 나서 회사 중장기 전략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창사 이래 거의 없다.
특히 이날 삼성은 제일모직의 손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미국 나스닥 상장계획까지 밝혔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지분 90.3%를 보유하고 있다. 상장으로 기업가치가 커지면 제일모직의 기업가치로 고스란히 반영된다. 바로 전일인 지난 달 30일에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최고경영자(CEO)들이 거의 다 참석한 가운데 기업설명회(IR)를 갖고 투명경영을 위한 합병법인의 거버넌스(지배구조)위원회 설치, 이익 30% 배당 등의 주주중심 경영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주요 삼성 계열사의 지난해 배당성향은 삼성전자 13%, 삼성전기 11.6%, 삼성생명 25.4%, 삼성화재 23.8% 등이다. 제일모직의 배당성향을 주요 계열사 가운데 최고로 높일 경우 이재용 부회장 등 특수관계인이 더 많은 배당을 받게 된다. 삼성으로서는 여론의 부담을 무릅쓰고서라도 주주들의 마음을 잡기 위한 ‘결심’을 한 셈이다.
엘리엇 등이 이번 합병에서 삼성물산이 저평가됐다는 주장을 펼치는 데 맞서 오히려 제일모직의 기업가치 역시 제대로 평가된 게 아니라고 역공을 펼침으로써 합병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모습이다.
기업설명회에 참석한 한 애널리스트는 “엘리엇의 노림수 가운데 하나가 삼성물산의 저평가 여부를 놓고 삼성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라며 “삼성이 이 같은 전략을 파악, 엘리엇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제일모직의 유망한 기업가치를 내세우는 작전을 택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이 같은 ‘당근’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채찍’도 들었다. 삼성은 “제일모직은 바이오 등 신규 미래 사업이 가시화돼 중장기적으로 주가 상승세가 예상되지만 삼성물산은 주가가 정체된 상태라 시간을 끌면 합병 비율이 더 불리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증시의 한 관계자는 “이번 합병기회를 놓치면 알짜인 제일모직에 대한 투자기회는 잃고, 미래도 불투명한 삼성물산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는 경고로 이해된다”고 풀이했다.
삼성이 반격을 본격화했지만 여전히 판세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삼성물산 지분 2.1%를 보유한 일성신약이 엘리엇 편에 섰고, 외국인 투자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의결권자문사 ISS도 합병 반대를 권고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펀드매니저는 “삼성은 최소 46.7%, 최대 66.7%를 확보해야 하는 반면 엘리엇은 그 절반인 최소 23.4%, 최대 33.4%의 의결권만 가지면 된다”면서 “그런데 지금까지 확보된 지분을 보면 삼성 19.95%. 엘리엇 11.43%으로 이른바 승리를 위한 ‘매직넘버’에는 엘리엇이 좀 더 가까이 가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영향이 큰 <파이낸셜타임스>(FT), <월스트리트저널>(WJS) 등 해외 유력언론들은 일반 기사는 물론 사설 등을 통해 이번 합병주총을 한국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할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하고 있다. 엘리엇이 이미 확보한 지분을 제외한 외국인 지분율은 24%에 달한다.
국내 모 사모투자펀드(PEF) 관계자는 “이번 합병이 부결되면 다음 엘리엇의 행보는 이번에 의결권을 함께한 주주들과 연합, 합병무산에 대한 책임을 물어 현재 이사진을 개편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할 새로운 이사를 선임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렇게 되면 자칫 삼성물산이 행사할 삼성전자 지분 4.1%의 의결권도 삼성의 뜻대로 행사하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관측했다.
특히 합병이 무산될 경우 KCC가 보유한 자사주의 의결권도 지속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법원의 1일 판결에서는 자사주의결권 중지 가처분에 대한 판단이 유보됐다. 17일 주총 전에 판결이 나올 전망이지만, 어디까지나 ‘가처분 소송’인 만큼 임시적인 판단이다. 설령 17일 주총에서 이 자사주 의결권이 행사된다고 해도 엘리엇 측이 항소 등을 통해 계속 문제를 삼을 경우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법조계에서도 자사주 매각이 적법하다는 의견과, 합병으로 이익을 얻을 합병법인 대주주에게 피합병법인의 자사주를 넘긴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 팽팽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자사주 매각에 문제가 있다는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올 경우 엘리엇 등의 삼성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