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선생의 외손자 미구엘 익태 안 씨는 한국인들의 애국가임을 강조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정확히 말하면, 여섯 살배기 내 아들을 포함해 둘이다(웃음). 한국 생활 4년째다. 현재는 여행사 ‘호텔베즈’(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레저여행 그룹 투이의 자회사)에서 동아시아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주로 외국에 있는 여행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엔, 싱가포르의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미 이전에도 한국과 연이 있다.
“그렇다. 2003년에서 2005년까지 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또 1982년, 당시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안 선생의 셋째딸 레오노르)와 함께 한국에 잠시 산 적이 있다. 당시 난 열두세 살 정도였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당시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갖고 있다.”
―당시 불과 1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나.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스페인으로 돌아가 일을 하고 싶어 하셨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스페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셨다. 얼마 전, 주 스페인 대사(박희권)를 만났는데, 예전 현지 대사관에서 일하던 우리 어머니를 기억하고 계시더라.”
―외손자임에도 할아버지의 성을 따른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외할아버지는 딸만 셋이다. 누군가 따르지 않으면, 안씨 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내가 이어받았다. 외할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무엇보다 (스페인에서) ‘한국’에 나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쓰고 있다. 나의 미들네임도 외할아버지의 ‘익태(Eaktai)’를 그대로 쓴다. 또 내 애칭인 ‘에키토’는 스페인어로 ‘작은 익태’라는 뜻을 담고 있다. 스페인에선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성이나 이름을 따르는 것이 흔하다.”
―외할머니나 어머니로부터 들은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나는 마요르카 집에서 열여섯부터 스물넷까지 어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두 분은 아침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줄곧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외할아버지는 속이 훤히 보이시고,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전해 들었다. 마르고 작은 체구셨지만, 에너지는 항상 넘치는 분이셨다고.”
―생전 안익태 선생은 일에 있어서는 고집불통에 외골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격하게 동감을 표하며) 맞다. 외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길 원하셨다.”
―작은 실수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외할아버지가 마요르카 오케스트라와 처음 계약하실 때, 당시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는 동네 악단 수준이었다. 당시 외할아버지는 세계적인 지휘자셨다. 축구로 따지면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대표팀을 맡은 히딩크 감독과 같은 존재였다. 외할아버지는 단원들이 완벽하게 연주하길 원했다. 이 때문에 단원들에게 엄하게 하셨지만, 일이 끝나면 언제나 단원들을 사랑해주셨다.”
미구엘 안 씨는 외할아버지 안익태 선생이 다소 고집이 심하고 불같은 성격임에도 한사코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70년 전, 그것도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한국인과 유럽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일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결혼 후에 피로로 인해 간질환(사망 당시 그의 사인)을 얻었을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셨다. 아침은 스페인에서, 점심은 프랑스에서 먹을 정도의 고된 스케줄이었다. 그럼에도 외할아버지는 여름이면 해변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나갔다. 항상 우리 어머니를 어깨에 태워 수영을 했다고 한다. 또 딸들에게 ‘아리랑’도 즐겨 불려주셨다고 한다. 그 만큼 가정적인 분이셨다.”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는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나.
“지금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는 외할아버지를 기리고 있다. 다만 최근 스페인의 정치적·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 오케스트라의 유지 예산이 부족해졌다. 오케스트라 측은 정부의 예산 삭감을 막기 위해 우리 유족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마요르카에서 외할아버지를 기억한다. 마요르카에는 외할아버지의 동상도 있고,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미구엘 안 씨의 표현대로 당시 세계적인 음악가였던 안익태 선생은 스페인 마요르카에선 히딩크 감독 같은 존재로 통했다. 지금이야 한류가 세계를 호령한다지만, 당시는 한국의 존재감 자체가 희미했던 시기였다. 미구엘 안 씨는 당시 안 선생의 명성과 관련된 일화를 들려줬다.
“대학을 마치고 첫 직장으로 은행에 취업했다. 당시 지점장님이 우리 외할아버지를 잘 알고 계시더라. 당시만 해도 마요르카엔 우리 외할아버지를 포함해 외국인이 두 명이었다고 한다. 그 지점장님은 우리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다녀가셨다고 일러주시더라. 그 외에도 마요르카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곤 했다. 물론 나와 우리 어머니도 많은 예쁨을 받았다.”
―지금 ‘애국가’를 들으면 어떤 기분인가.
“애국가는 항상 내 심장에 간직하고 있다.”
―10년 전, 그런 애국가의 저작권을 유족들이 무상 기증했다.
“2002년 월드컵의 영향으로 애국가가 더욱 주목받게 됐다. 당시 대표팀이 계속 올라가서 애국가를 더 많이 틀게 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 당시 온라인상에서 ‘왜 애국가를 트는데, 저작권료를 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들에 대한 거짓 소문도 생겼다. 사실 당시 애국가 저작권이 우리 가족에 실질적으로 많은 돈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애국가는 한국인이 향유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한국인이 애국가를 통해 더 많은 애국심을 담길 바라며 기증하게 됐다.”
미구엘 씨가 태어나기 전의 사진으로 안익태 선생과 부인 롤리타 여사, 딸 셋의 가족 사진.
―현재 애국가는 법적으로 규정된 국가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나.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에 대한 합법적 지위를 위해 법안 마련에 노력중이기도 하다.
“난 변호사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내 나름의 해석이 있다. 합법적이라는 것은 의회를 거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허나 애국가는 지난 수십 년간 (국가로서) 여러 행사에서 쓰였고 불려왔다. 한국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도 애국가를 사용한다. 법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다만 현재 의회에서 애국가의 합법적 지위를 위해 노력하는 부분에 대해선 긍정적이라고 본다.”
―2000년대 이후 안익태 선생의 친일 행적과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솔직한 생각은.
“가슴 아픈 일이다. 애국가는 ‘한국 환상곡(코리아 판타지)’의 일부다. 이 곡을 들으면 아마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친일 행적을 한 사람이 만든 작품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친일 행적에 관해 지금 나온 이야기나 증거들은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가 경기에 임하기 전, 우리 외할아버지는 그를 따로 불러 애국가를 들려줬다. 또 일왕 앞에서 콘서트를 했을 때도 외할아버지는 마지막에 굳이 애국가를 지휘하셨다. 한국 정부나 재단 같은 권위 있는 단체나 인물들이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확인 작업을 해주셨으면 한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안익태 선생 서거 50주년에 애국가 탄생 80주년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안익태 선생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는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직접 책 두 권 분량의 자서전을 쓰셨다. 그 원고를 지금 우리 유족들이 갖고 있다.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외할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출판했지만, 가족들에게 검토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첫 번째 파트는 마요르카 시청이 외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현지에서 함께 출판했지만, 두 번째 파트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물론 첫 번째 파트도 한국에서는 출판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다.”
―어떤 성격의 원고인가.
“단순한 역사책이나 전기가 아니다. 우리 외할머니께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진짜 이야기들을 그대로 담았다. 이 때문에 충분히 가치 있는 자료라고 본다.”
―한국에서 공개하고 출판할 의향이 있는가.
“만약 한국에서 관심이 있으면, 생각해보겠다. 다만 고민 중인 부분도 있다. 이제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남은 자료기 때문에 되도록 좋은 번역가와 출판 기획을 통해 잘 하고 싶다.”
미구엘 안 씨는 이번 <일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롤리타 안 여사의 육필 원고’ 존재를 처음 알렸다. 지난 2005년 롤리타 안 여사는 방한 자리에서 ‘향후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그 원고가 완성돼 실제 자료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전에도 안익태 선생에 대한 전기와 관련 서적들은 출간된 바 있지만, 실제 유족들이 남긴 자료는 이것이 유일한 셈이다. 기존 자료들은 유족들의 검증 과정이 미흡했기에, 다소 불확실한 내용도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만약 롤리타 안 여사의 원고가 올바른 과정을 거쳐 공개되고 출판된다면 국내 음악사의 사료적 가치로서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에게 외할아버지와 한국은 어떤 의미인가.
“이제 한국이 집 같다. 당분간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다. 한국에서 만난 어떤 택시기사는 매일 아침 한국 환상곡을 듣는다고 나를 반겨주기도 했다. 우리 외할머니도 생전에 한국 관광객이 찾아오면, 언제나 라면과 불고기를 대접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했다. 스페인은 한국에서 굉장히 먼 곳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한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한국을 쉽게 잊었을 것이다. 진심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나의 노래 애국가’ 안익태 기념 음악회 애국가 탄생 80주년 광복 70주년 안익태 서거 50주년을 맞아 안익태기념재단과 일요신문이 기념 음악회를 공동주최합니다. 8월 24일 저녁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한국환상곡을 비롯한 안익태 작품 연주와 다양한 축하공연이 펼쳐집니다. 음악 애호가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