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국고전번역원은 조선왕조실록의 재번역 작업을 하면서 정확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원 안 사진은 정조의 이름이 이산에서 이성으로 변해왔음을 밝히는 긴 주석.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었을까요? ‘이성’이었을까요? 정조 이름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조선왕조실록> 재번역을 하면서 한 번역위원이 정조 이름과 관련한 논문과 자료를 샅샅이 찾아냈어요. 결국 이를 종합해 정조 이름과 관련한 주석을 달았는데 이 작업만 꼬박 이틀이 걸렸어요.”
한국고전번역원 정영미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은 번역을 위해 실록의 5~10배에 해당하는 자료를 찾아야 하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 독자들에게 고충으로 비칠 이 작업은 고전번역가들에게는 곧 ‘자긍심’이다. 오는 2026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2011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실록 재번역 사업에서는 ‘(정조) 대왕의 휘(왕의 이름)’를 ‘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산’이라는 표기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산’에서 ‘이성’으로 변해왔음을 주석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조선왕조 콘텐츠의 산실이 된 한국고전번역원은 민간기관으로 운영해오다 지난 2007년 교육부 산하 학술연구기관으로 승인받았다. 그동안 고전번역원은 우리나라 고전번역의 70% 이상을 소화해 냈다. 여기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중요한 국가기록도 포함돼 있다.
실록은 1993년 이미 한 차례 완역된 바 있다. 하지만 1차 번역의 오류와 한문을 직역한 문장은 늘 문제점으로 지적돼왔다. 이 때문에 고전번역원이 재번역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도 ‘정확한 번역’이다.
실록 번역을 위해서는 <승정원일기> 등의 번역 경험이 전제돼 있어야 한다.
실록을 정확하게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실록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축약해서 간단하게 썼기에 실록만 가지고서는 정확한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이 때문에 실록 번역위원들은 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왕을 보좌하면서 날마다 기록한 <승정원일기>나 왕의 동정과 국정을 일기체로 쓴 <일성록> 같은 원문 자료들을 끼고 살아야 한다. 정영미 팀장은 “실록 번역은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번역 경험이 있고, 사료를 다뤄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한문뿐 아니라 당시의 문화 제도 법전 등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며 “재번역에서는 실록 전체의 맥락을 볼 수 있도록 주석이 강화됐다. 1차 번역에 비해 주석이 6배 정도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1차 번역에 비해 번역 환경은 많이 개선된 편이다. 원문 자료가 데이터베이스화 되면서 원하는 정보를 비교적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됐다. 체계적으로 어휘의 용례를 정리하면서 번역의 수준도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실록 재번역은 6% 정도 진행된 상태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실록 원문을 한 장 번역하는데 하루 이상이 걸리는 것은 기본이다.
이규옥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수석연구위원은 “국가에서 많이 투자한다고 해도 당장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이 고전 번역 사업이다. 고전 번역은 고도화된 전문인력이 양성되지 않으면 당장 성과가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의 번역위원 1명이 양성되는 데는 적어도 5~10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번역교육원에서 선발하는 인원이 한 해 50~60명으로 ‘사서삼경’ 정도를 기본으로 익힌 사람들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교육원에 들어와도 5~7년의 연수기간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연수를 끝냈다고 모두 번역위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으로 실록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번역위원은 1년에 2~3명 나온다. 그만큼 고전번역 전문인력 양성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과정이다.
이기찬 역사문헌번역실 실장은 “고전번역 인재양성이 굉장히 힘든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고전번역교육원은 여전히 비학위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자체적으로 고전번역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해 석·박사과정으로 개편하기 위해 교육부와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정영미 팀장은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불과 100년 전 조상들과의 전통이 단절된 경우다. 외국의 경우 학부를 마치면 조상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국가가 조상들의 문헌을 번역하는 기관을 두는 특수한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이다”라며 “고전번역가라는 직업이 어려운 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공부하고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직업”이라고 덧붙였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조선왕조실록’ 1차 번역 비화 빨리빨리 치중…기초 없이 부실공사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남아있던 1960년대, 정부와 학계는 <조선왕조실록> 번역에 손을 대지 못했다. 결국 개국 이래 단일서목으로는 최대의 번역사업이었다는 실록 번역은 국가보조금을 받는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 두 민간기관의 주도로 이뤄졌다.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실록. 소수의 원로들이 번역기관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지방에 흩어져 있던 한학자들을 집결시켰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규옥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수석연구위원은 “한자와 한문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던 1960년대는 상당한 역량을 지닌 한학자들이 할 일이 없어 농사를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고 모인 한학자들로 번역원 일대가 ‘한학의 메카’로 떠올랐다. 그렇게 모인 한학자들은 2년간의 재교육을 받고 실록 번역에 참여했다. 당시의 처우를 생각하면 사명감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들어서자 북한이 먼저 <리조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실록을 완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심했던 상황에 들려온 이 소식으로 실록 번역은 국가 주요 사업이 됐다. 번역인력 90% 이상이 실록 번역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다. 그럼에도 환경은 열악했다. 1965년 민족문화추진회로 출발한 이래 셋방살이를 하던 번역원은 1986년 종로구 구기동의 건물을 매입하기 전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당주동, 동대문구 청량리동, 종로구 사직동 등을 전전했다. 35℃를 웃도는 한여름 더위에도 땀을 흘리며 좁은 사무실에 앉아 번역에 매진해야 했다. 2~3월에 국가 예산을 받아 책을 내야 하는 12월이 오면 번역위원들이 인쇄소 옆에 방을 얻어 밤을 지새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활판인쇄를 하던 시절이라 인쇄지가 나오면 교정을 보고 다시 가져다주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1968년부터 착수한 실록 1차 번역은 1993년에서야 끝이 났다. 완역까지 26년이 걸린 셈이다. 실록 완역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실록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역자학자부터 대중들까지 독자층 저변이 넓어졌다.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관심도 실록 완역을 기점으로 환기됐다. 북한이 먼저 완역했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덜게 된 것도 실록 완역이 불러온 효과였다. 그러나 1차 번역은 많은 문제점이 지적됐다. ‘빨리빨리’에만 치중했던 실록 1차 번역은 빈번한 오류와 전문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옛 어투, 중국 고사성어 풀이에 중점을 둔 주석 등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규옥 수석연구위원은 “1차 번역은 이번 재번역 사업의 반면교사가 됐다. 당시 번역에 참여한 한학자들은 원전에는 박식하지만 우리말로 옮기는 것에 취약한 점이 있었다. 번역보다 원전에 강했던 것”이라며 “당시는 거의 부업적 번역이었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학에 조예 있는 분들이 300~400매 조각으로 나눠 밤이나 휴일에 번역을 하는 것이다. 한 해 수십 명이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전문성을 갖추기가 어려운 시스템이었다”고 설명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으로 실록 번역을 무리하게 서두른 것도 자충수가 됐다. 대규모 번역 사업에 앞서서 기사분류나 어휘정리가 우선돼야 했지만 대부분의 과정은 생략되거나 번역과 동시에 진행됐다. 정영미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은 “당시에는 빨리 완역하는 것이 목표였다. 실록 번역을 주도하던 두 기관이 긴밀한 협의 없이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기념사업회가’, ‘연산군일기부터 정조실록 중간까지는 번역원이’ 하는 식의 번역이 이뤄졌다”며 “지금은 한국고전번역원이 정부산하기관이 되면서 실록 재번역을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실록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
북한 ‘리조실록’은 어떻게 다른가 일제가 편찬해 논란된 고종·순종실록 담겨 북한이 1991년 <리조실록> 400권을 완간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실록 번역은 사실상 1981~1982년에 완역을 마쳤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보다 늦은 1993년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마쳤다. 같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두고 남한과 북한의 번역은 어떤 차이를 보였을까. 북한의 리조실록. 민간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남한과 달리 북한의 <리조실록> 번역은 철저한 국가주도 아래 이뤄졌다. 북한은 사회과학원 산하 민족고전연구소에 100~150명의 연구원을 두고 1954년부터 주요 고전 번역에 착수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의 아들 홍기문이 총괄한 <리조실록> 번역은 작업 전 어휘에 대한 통일안과 기사를 분류한 자료집이 마련된 상태에서 시작됐다. 10년 이상 사전준비를 한 것이다. 당연히 번역의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정영미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은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장서각에 있던 실록을 북한으로 가져갔다. 이로 미루어보아 북한은 오래전 부터 <리조실록> 번역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홍기문이라는 대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북한의 <리조실록> 초기 번역은 남한보다 더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 번역까지는 결과물이 남한 것보다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문어투와 직역이 많은 남한의 실록에 비해 <리조실록>은 ‘사람들이 보고 알 수 있도록 쉬운 말로 번역하는 것’이 원칙이었던 만큼 문장 구조와 용어가 우리말 어순으로 쉽게 풀이돼있다. 한의 실록에 포함되어있지 않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모두 다룬 것도 <리조실록>의 특징이다. 남한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실록도 사초작업을 거쳐 그 다음 왕이 즉위한 다음 전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제작과정을 유지한 ‘철종실록’까지 만을 인정하고 있다. 정영미 팀장은 “일본이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세계에 유례없는 일정한 시스템을 유지하며 만들어진 다른 실록과 같이 인정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대신 고종 순종은 <승정원일기>와 같은 자료를 번역한다. 하지만 이번 실록 재번역 사업에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