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선 유력한 차기주자로 급부상한 유승민 전 원내대표(오른쪽)가 세력화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경우 박근혜 대통령(왼쪽)과 일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일요신문 DB
7월 16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 회동 직후 기자와 통화한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의 한숨 섞인 말이다. 그는 “당청 관계를 회복한다는 명목이겠지만 누가 봐도 현 상황은 당이 청와대에 무릎을 꿇은 것 아니냐. 당은 청와대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정권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면서 “박 대통령 입장에선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반란’을 진압한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신임 원내대표가 얼마나 고맙겠느냐. 그래서 아마 청와대로 불러 둘에게 힘을 실어주고 당의 민원을 해결해준다고 약속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권 핵심부는 16일 회동을 계기로 ‘유승민 파동’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부 기류는 여전히 심상치 않다. 유 전 원내대표는 단숨에 유력 차기주자로 급부상했다. 김 대표와 신임 원내지도부가 청와대를 방문, 박 대통령과 만났지만 유 전 원내대표 사퇴의 여진은 아직 남아있다는 얘기다. 청와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청와대 정무 라인 관계자는 “우리가 제일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은 박 대통령 지지 기반인 대구·경북(TK) 민심이다.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유 원내대표 지지율이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 반면, 박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지고 있다. 그 추이를 예의주시해서 체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박 대통령과 20분간 독대하며 집권당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김무성 대표 속사정 역시 녹록지만은 않다. 김 대표 주변에선 ‘웃는 게 웃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들린다. 역시 유 전 원내대표와의 미묘한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김 대표는 박 대통령 신임을 얻었을지는 몰라도 당내 입지는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적지 않은 의원들이 유 전 원내대표를 모른 체했던 김 대표에 대해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유 전 원내대표가 ‘김무성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도 김 대표로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김 대표계로 분류되는 새누리당 의원은 “이제 유 전 원내대표 타깃은 김 대표다. 그동안 당 내에서 독주하다시피 했던 김 대표로선 강력한 경쟁자를 만나게 된 것”이라면서 “당·청 간 수평적 관계를 원하며 김 대표에게 줄을 섰던 초·재선 의원 그룹이 빠르게 유 전 원내대표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털어놨다. 권대우 정치평론가 역시 “박 대통령과 김 대표 껄끄럽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김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김 대표의 정치적 위상도 높아질 수 있었다. 이번 7월 16일 회동은 ‘유승민’이라는 외부의 적을 맞아 박 대통령과 김 대표가 전략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치권 주변에선 유 전 원내대표가 조만간 본격적으로 대권 행보에 나설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본의 아니게’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른 유 전 원내대표는 현재 지인들을 만나 향후 정치 일정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원내대표직을 던진 직후인 7월 11~12일엔 자신의 지역구이자 새누리당 성지인 대구를 찾았다. 몇몇 의원들은 이를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유 전 원내대표는 최대한 신중한 모습이지만 물밑에선 정치적 세를 불리는 데 공을 들인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구 지역의 한 의원은 “유 전 원내대표가 스터디 형식의 정책 모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물론 직접 나서진 않을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가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모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는 유 전 원내대표의 지지율 급등 현상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란 반론도 나온다. 그러나 유 전 원내대표가 여권 진영의 차기 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관측엔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야권은 유 전 원내대표를 가장 두려워하는 대선 후보로 꼽는다.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다. 야권 지지층 중 상당수가 유 전 원내대표에 대해 거부감이 적다”면서 “유 전 원내대표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럴까. 유 전 원내대표는 대통령을 반대 프레임으로 놓고 스스로 ‘정치인 유승민’의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 전 원내대표는 ‘박근혜-김무성’ 연합군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1보 후퇴하되 2보 전진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사실 청와대는 유 전 원내대표가 취임할 때부터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인사들은 유 전 원내대표를 가리켜 여권의 ‘트로이 목마’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유 전 원내대표가 결국은 박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댈 것으로 내다봤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당시는 유 전 원내대표를 못 믿을 사람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싸워서 주저앉혀야 할 상대로 본다. 유 전 원내대표에 대한 감정의 골이 다시는 회복되기 힘들만큼 깊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청와대는 유 전 원내대표가 사퇴 기자회견에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라고 한 것에 대해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유 전 원내대표 기자회견을 지켜본 대부분이 화를 삭이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거론하진 않았지만 박 대통령을 비민주적 독재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 아니냐”면서 “박 대통령을 향한 (유 전 원내대표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여권 핵심부의 분노가 구체적인 ‘액션’으로 옮겨갈지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청와대 비서실엔 얼마 전부터 핵심 친박 인사들이 만든 이른바 ‘유승민 보고서’가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보고서들은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 발언을 한 직후부터 집중적으로 작성됐다. 여기엔 개인 비리 의혹을 비롯해 유 전 원내대표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앞서의 박 대통령 측근 원로 인사는 “여러 버전의 보고서들이 청와대로 전달되고 있다. 유 전 원내대표 총선 공천 불가론, 유 전 원내대표의 수도권 차출론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또 유 전 원내대표가 무소속 또는 신당으로 출마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복안도 포함돼 있다”면서 “이는 청와대가 유 전 원내대표의 대권 행보를 호락호락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