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룡해 당비서의 5촌 조카로 추정되는 오 아무개 씨(오른쪽)가 6월 15일 서울시 관악구 모 은행 부근에서 보이스피싱에 이용할 통장 명의자를 만나서 대화하는 모습.
“촌에 가면 순수한 총각들 있다 아입니까. 그런 풍이라….”
지난 15일, 부산 사하경찰서 관계자는 구속된 최룡해의 5촌 조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검거 당시 복장도 남루해 아무리 봐도 북한 고위층의 친척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오 씨가 최룡해의 조카라는 사실을 경찰도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그는 마음고생을 한 듯 “그날 죽는 줄 알았다. 경찰청, 대검찰청에서 얼마나 전화가 오는지…”라며 손사래를 쳤다.
지난 6월 23일 부산 사하경찰서는 ‘평범한 중국 동포’ 오 아무개 씨를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로 붙잡았다. 경찰은 당시 단순 보이스 피싱 범죄로 보고 검찰로 송치했다. 오 씨는 곧바로 구속돼 부산구치소에 수감됐다. 일주일 뒤인 지난 1일, 검찰도 어떤 의심도 없이 오 씨를 보이스 피싱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수사가 종결되려던 찰나, 8일 <조선일보>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해 오 씨를 최룡해의 5촌 조카로 지목했다. 오 씨가 최룡해 부친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 여동생 최정해의 둘째 손자라는 것. 검찰과 국가정보원은 그날 즉시 오 씨의 신원파악에 착수했다.
북한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백두산 줄기’로 구분해 특권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북한에서 가장 출신이 좋은 사람들 중 하나다. 증손자나 6촌 이상의 친척까지도 조상 덕을 본다고 할 정도다. 최현은 김일성과 함께 중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혁명 1세대’로, 김일성 체제 구축과 김정일 권력 세습에 공을 세웠다. 오 씨가 최현의 아들 최룡해의 5촌 조카라면, 백두산 줄기가 공안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한국에 들어와 활보했다는 뜻이 된다. 적잖은 파장이 일 수 있는 부분이다.
오 씨는 과연 최룡해의 5촌 조카가 맞을까. 검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오 씨를 불러다 조사했다. 오 씨는 ‘최현이나 최룡해를 만난 적은 없지만 평소 아버지로부터 최룡해의 핏줄이라는 내용을 들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최룡해의 친척이 맞다. 그 이상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왼쪽)가 김정은과 함께한 모습.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한 북한 전문가의 분석이 눈길을 끈다. 그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오 씨는 최룡해와 5촌이 맞다. 원래 그는 집안에서도 약간 별종에 가까웠다. 오 씨의 형은 현재 중국과 나진·선봉 특구를 오가며 활발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며 “북한에선 5촌은 굉장히 가까운 사이다. 오히려 북한이 남한보다도 친인척과 더욱 가깝게 지낸다”고 밝혔다. “최룡해는 함경북도 신천 출신으로 평양으로 올라간 뒤에도 자기 고향을 자주 방문할 정도로 애착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런 오 씨가 어떻게 보이스 피싱 범죄에 연루된 걸까. 경찰 조사를 토대로 구성한 전말은 이렇다. 오 씨는 최룡해 집안의 중국 근거지인 헤이룽장(黑龍江)성 지둥(鷄東)현에서 태어났다. 국적도 중국이다. 그는 중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아내와 두 딸, 이렇게 네 가족이 함께 살았지만 형편은 갈수록 빠듯했다.
특히 두 딸의 학비 마련이 시급했던 오 씨는 한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결국 지난 5월 23일 그는 3개월짜리 단기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엔 친척도 지인도 없었다. 나이도 적지 않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는 여관, 찜질방 그리고 모텔을 전전하다 ‘회사 비자금을 인출해서 송금하는 아르바이트’라는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의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경찰은 “좀 순진했다. 나중엔 보이스 피싱이라는 걸 알고도 멈추지 않았다”며 “오 씨 입장에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오 씨는 ‘인출책’이었다. 한국에 있는 피해자가 검사 사칭 전화에 속아 돈을 대포통장에 입금하면 원래 대포통장 명의자를 만나 이를 ‘송금책’에게 넘기는 역할이다. 보이스 피싱 전문 A 조직은 중국에 거점을 두고 오 씨에게 지령을 내렸다. 수법 역시 지능적이었다.
오 씨는 A 조직과 연락할 때 오로지 ‘위챗(we chat)’을 사용했다. 위챗은 중국판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삭제하면 다시 복원하기 어렵다. 오 씨를 포함한 한국의 조직원들은 점조직처럼 흩어져 서로를 알 수 없었다. 평소에는 각각 A 조직의 지령을 받았다. 인출이나 송금이 이루어지는 날, 즉 보이스 작업이 완료됐을 때만 그룹 채팅방에서 함께 지령을 받았다.
오 씨 사건의 피해자 신 아무개 씨(여·27)는 서울에 거주하는 평범한 주부였다. 신 씨는 지난 6월 “검찰이다. 당신 계좌가 보이스 피싱 범죄에 도용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A 조직은 전화를 끊으면 범인으로 지목한다고 윽박지르는 수법을 사용했다”며 “신 씨는 부랴부랴 가짜 검찰청 사이트에 들어가 계좌번호 등 개인정보를 전부 입력했다”고 설명했다. 그 순간 신 씨의 개인 정보가 빠져나갔고 A 조직은 신 씨의 적금 통장을 해약해 약 3980만 원을 빼냈다. 그 돈은 B 씨 명의의 대포통장 계좌로 고스란히 입금됐다.
A 조직이 간과한 점은 B 씨가 대포통장 명의 도용으로 부산 사하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은 한 달 전 다른 보이스 피싱 범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B 씨의 통장이 도용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A 조직이 또 다시 B 씨의 통장을 입금용 대포통장으로 이용하려고 B 씨에게 접근하자 B 씨는 이를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B 씨와 함께 상경해 두 사람의 접선 현장인 서울 관악구의 한 은행 지점 앞에서 잠복, B 씨를 만나러 온 오 씨를 현장에서 체포했다. 범행 증거도 명백했다. 그의 위챗 대화창에는 ‘통장명의자 B 씨를 만나라. 생김새는 이렇다’ 등 A 조직의 지령이 남아있었다. 오 씨는 현장 체포 당시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다고 한다.
경찰은 신 씨에게 피해금액 일체를 돌려줬다. 신 씨는 경찰이 범인을 잡았다고 전화를 했을 당시에도 경찰조차 믿지 않을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오 씨만 잡았다. 중국에 있는 조직은 전화번호도 다르고 중국에 서버를 두고 있어 도저히 추적이 안 됐다”고 전했다.
이 같은 경찰의 설명에도 오 씨가 ‘단순 보이스 피싱 가담자’에 불과한지 의문점은 남는다. 먼저 범행동기. 오 씨는 경찰 조사에서 “딸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에 가담했다”고 진술했다. 오 씨는 한국에 입국한 지 20일 만에 보이스 피싱 범죄를 저질렀다. 경찰에 따르면 인출책인 오 씨의 몫은 4000만 원에 이르는 피해 금액 중 1.5%뿐이었다. 북한의 특권층에 속하는 ‘백두산 줄기’가 약 60만 원을 받기 위해 한국까지 와 보이스 피싱을 했다는 얘기다.
오 씨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도 수상하다. 경찰 관계자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한국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로 억양 자체가 완전히 한국말이었다”며 “우리말을 너무 잘 썼고 분명 북한 억양이나 조선족 억양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혹시 그가 철저한 훈련을 받고 다른 목적으로 입국한 것은 아닐까. 앞서의 국정원 관계자는 “공안사범 여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공안당국의 추가 수사 결과가 주목된다.
부산=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