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현대판 햄릿’이 늘고 있다. 왼쪽 사진처럼 사소한 선택을 도와주는 앱도 등장했다. 임준선 기자
20대 주부 A 씨는 집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보고 청소기를 사기 위해 가전제품 매장에 들렀다. 디자인과 성능이 다른 무선청소기와 유선청소기 두 개가 A 씨의 눈에 들어왔다. 동선이 자유로운 무선청소기와 충전할 필요가 없는 유선청소기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을 살지 결정하지 못한 A 씨는 집으로 돌아왔다. A 씨는 인터넷에 ‘이걸 살까요?, 저걸 살까요?’라고 물어 본 다음 또 다시 매장을 향했다. 매장 문턱만 오가길 한 달째, A 씨는 청소기를 구입하지 못했다. 그 사이 A 씨의 결정장애를 타박하는 남편과 실랑이가 오가기도 했다.
‘골드 미스’인 30대 회사원 B 씨는 올해는 결혼하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정보회사에 등록했다. 하지만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만난 상대는 ‘운명의 남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B 씨는 친구들과의 채팅방에 상대방의 사진과 나이, 직업, 연봉 등을 올리며 누굴 선택해야 하는지 매번 상담을 했다.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B 씨의 말에 귀기울여주던 친구들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매번 갈팡질팡하는 B 씨의 메시지에 시큰둥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큰 결정을 앞두고 조급함을 느끼던 B 씨는 신경정신과를 찾아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맞느냐’고 상담하기에 이른다.
음식 메뉴를 결정하는 것부터 결혼과 같은 대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해 불안해하거나 초조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결정장애’ 혹은 ‘햄릿증후군’이라고 한다.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라는 말처럼, 누구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항상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사회가 개인화 되면서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 많아지고, 정보 과잉으로 선택지도 많이 늘어나면서 ‘자기 스스로 결정하기’는 더욱 복잡한 일이 됐다. 이 때문에 선택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현대판 햄릿’도 많이 늘어났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의 저자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결정장애가 정식 병명은 아니다. 사회적인 신드롬이나 현상 정도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며 “어렸을 적 부모가 삶에 개입을 많이 해 선택의 기회가 차단된 과잉 양육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결정장애를 겪는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달로 선택지가 많아지고 사회가 개인화 되면서 선택에 대한 권한이 급격히 발달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실제로 과거와는 달리 몇 년 사이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 ‘회사를 관둘까 말까’, ‘학부 전과를 할까 말까’,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등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늘었다. 젊은 사람들일 수록 그런 경향이 짙다”고 덧붙였다.
갈팡질팡하는 ‘현대판 햄릿’이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이들을 겨냥한 ‘결정장애 마케팅’도 성행하고 있다. 음식점의 ‘내맘대로’나 ‘아무거나’ 같은 메뉴가 선보인지는 이미 오래. 최근엔 스마트폰 앱도 등장했다. 점심메뉴와 같은 사소한 선택을 도와주는 라이프스타일 앱이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남자친구 바지 색깔 결정’, ‘성형을 할까 말까’ 등의 질문을 올려 투표에 붙이는 앱도 젊은층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 백화점이나 소셜커머스 업계도 고객의 쇼핑 패턴을 분석해 쇼핑목록을 간추려 주는 각종 큐레이션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처럼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남에게 결정을 기대는 소비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센터장 김난도 교수)는 2015년 한국 소비 트렌드의 첫 번째 키워드로 ‘햄릿증후군’을 꼽기도 했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인생이 복잡해지니까 10년 전부터 ‘멘토링’, ‘라이프 코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자상거래가 급격히 발달하던 2005년부터는 소비자들에게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물건만 가격별로 분류해 판매하는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했다”며 “정보의 홍수 속에서 뉴스를 간추려주는 야후의 뉴스 다이제스트나 허핑턴 포스트가 등장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개인의 선택을 도와주는 큐레이션 서비스나 스마트 에이전트의 등장은 개인의 우유부단함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복잡성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한국을 비롯한 일본, 미국과 같은 경쟁이 심하고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복잡한 사회에서 이러한 큐레이션 서비스가 더욱 발달해 있다”고 보탰다.
능동적인 선택이든 외부의 도움을 받은 결정이든 만족에 이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모든 선택은 후회와 미련을 남긴다. 다만, 결정을 통해 후회를 해야만 나중에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며 ‘21세기 햄릿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수평적 나열보다 수직적 배열이 필요하다. 분명 조금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하고 자신만의 취향이나 가치관도 있어야 한다. 선택도 근육과 같은 것이라 하면 할수록 잘하게 된다.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기보다 선택한 이후, 그 결과가 최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