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화상경마장은 전국 30여 개소 가운데 가장 큰 최신 시설이다. 이곳 13층은 ‘꾼’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일찍 오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고 한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17일 오후 용산 화상경마장 이전을 요구하는 천막 농성이 800여일째 이어지고 있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12일 일요일 오후 2시. 경마장 가는 길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사나운 날씨에 택시를 잡아탄 기자는 쭈뼛거리며 ‘용산 화상경마장’이라는 행선지를 밝혔다. 마사회는 전날인 11일부터 노을 경마를 시행하고 있다. 토·일요일은 첫 경주가 13시에 시작, 마지막 경주는 20시에 끝난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려도 천재지변 수준이 아닌 이상 취소되지 않는다.
용산 화상경마장 앞은 이전을 요구하는 농성 천막이 여전히 쳐져 있다. 이들의 투쟁은 벌써 802일을 기록하고 있었다. 농성장 입구엔 술에 취한 듯 팬티를 내리고 바닥에 드러누운 남성의 사진이 붙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경마에 중독된 남성을 담아낸, 입장객을 향한 일종의 경고문이었다.
오후 3시경. 13층은 이미 만석이었다. 로비에서 오가는 대화에 따르면 이곳 13층은 ‘꾼’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일찍 오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고 한다. 화상경마장은 당일 입장객에게 다음날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예약제를 운영하고 있다. 사실상 지정 좌석처럼 경마를 관전하며 베팅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건물 로비에는 ‘문화공감센터’ 강좌안내 브로슈어가 맨 먼저 눈에 띄었다. 노래교실에서부터 요가, 탭댄스, 외국어 수업, 정리수납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강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용산주민이라면 공짜다. 이와 함께 별도의 장학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화상경마장이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혐오시설’로 여겨지는 만큼 마사회에서는 이 같은 ‘당근책’으로 민심을 달래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등포 화상경마장의 경우 2013년 한 해 매출액만 4950억 원, 이 때문에 각 지자체에서는 화상경마장을 유치하기 위한 경쟁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실정이다.
용산 화상경마장은 전국 30여 개소 가운데 가장 큰 최신 시설이다. 입장료는 2만 원부터였는데 경마책자와 중식, 음료 등이 모두 포함된 가격이다. 이날은 초복 하루 전이었던 만큼 삼계탕 도시락이 제공됐다. 기자는 본전 생각에 식사와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리는 커피 2잔을 마셨다. 어느 카페 못지않은 풍미를 냈다.
주린 배를 채웠으니 베팅을 시작할 차례였다. 기자는 생전 처음으로 OMR 카드로 된 마토(mato, 마권 구매표)를 들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구에서 받은 경마잡지 속 숫자들은 길잡이가 되기는커녕 혼란만 가중시켰다. 각 말의 상태와 기수의 컨디션, 게이트 배정, 날씨 변수, 여기에다 역대 전적 및 배당률에 자칭타칭 전문가들 코멘트까지 더해져 마치 복잡한 함수식을 풀어야하는 수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국내 경마는 1등말을 맞히는 단승에서부터 상위 3개말을 맞히는 삼복승에 이르기까지 총 6종류가 있다. 뒤로 갈수록 맞을 확률은 낮아지나 되돌아오는 금액은 커진다. 베팅 한판에 100원에서부터 10만 원까지, 하루 100만 원 잃는 것은 예삿일이라고 한다.
대신 복연승이나 삼복승 고배당이 터지는 날엔 베팅액의 수백배까지 불어난다. 때문에 돈을 거의 탕진한 승부사(라고 쓰고 도박꾼으로 읽는다)들은 ‘대끼리(승률이 높은 말)’ 대신 일부러 고배당을 노리기도 한다. 실제 이날 기자 뒤에서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던 한 중년 남성은 뭔가 ‘촉’이 왔다는 듯이 옆 사람에게 현금 3만 원을 건네고 마권을 교환해 베팅 금액을 늘렸다. 전 경기에서 16만 원을 딴 상태였다.
마권은 개인 간 거래가 금지돼 있지만 층마다 배치된 직원들이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되레 말이 달리는 전광판을 휴대폰으로 찍으려는 기자를 더 신경쓰는 눈치였다. 급기야 한 직원이 다가와 “젊은 손님, 사진 찍으시면 안 된다. 다른 손님들에게 실례가 된다”고 점잖게 요청했다.
화상경마장은 전광판을 통해 각 경기마다 ‘인기 베팅’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입장객 상당수가 마감 1분 전에야 자신의 마토를 입력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시간으로 바뀌는 배당률과 배당금액을 살피며 ‘대끼리’를 잡기 위한 시도였다. 기자도 베팅에 직접 참여해봤다. 첫 경험에서 짜릿함과 쓴맛을 동시에 맛봤다. 첫 경기는 서울경마 9경주였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과천 최강의 스프린터로 알려진 와츠빌리지에 올인했다, 사실 이름을 들어본 유일한 말이었다. 결과는 10번 와츠빌리지와 6번 최강실러가 각각 1, 2위로 들어왔다. 술자리 경마 게임과는 비교되지 않는 짜릿함이 전해졌다. 각각 3000~4000원을 걸었으나 되돌아온 마권에는 3만 4300원가량 찍혔다.
용산 화상경마장은 1~8층까지 용산구민을 위한 문화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마토에서 특이한 점은 ‘자동’란이었다. 마사회는 직접 말을 고르지 않고도 기계가 자동으로 번호를 찍어주는 방식도 운용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로또 자동과 같은 개념이었다. 경마가 결국 사행성 오락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와 함께 마사회는 최근 스마트폰 ‘장내 베팅 어플리케이션’을 도입, 전국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과천경마장이 아닌 집 근처에 화상경마장이 있어 접근성이 쉬워진 것도 확실히 무서운 점이었다. 실제 지난해 용산 화상경마장 평가단 조사에 의하면, 이용객의 2%가 화상경마장 입점 이후 경마를 시작, 출입객 601명 중 18.8%가 인근 거주자였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흔히 “친구를 망하게 하고 싶으면 경마장으로 데려가라”는 말이 있다. 경마가 그만큼 중독성 강한 사행성 게임이라는 뜻이다. “요즘 경마장은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 추천받는 곳”이라는 반박도 있다. 건전한 스포츠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뜻에서다.
기자 역시 연애가 무르익을 즈음 연인과 함께 데이트 코스로 화상경마장을 감히 추천하는 바다. 배우자의 수학연상능력, 경제적 감각, 그리고 어느 순간 베팅을 멈출 줄 아는 지혜가 있는지 엿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혹여 판돈을 잃고 “한 판 더”를 외치며 “도박의 땅에서 넘어졌으니, 이 땅을 짚고 일어서야겠어”라는 결기에 사로잡히는 사람이라면 평생 반려자로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용산 화상경마장은 이전 과정을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하면서 주민들과 충분히 협상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개장 이후에도 약속과 달리 저가 입장권을 팔거나 미성년자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지 못하는 등 허점을 보인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투쟁위원회는 이날도 건물 입구에 한 줄로 서 손을 잡고 이용객의 입장을 막는 ‘인간띠 잇기’ 캠페인을 벌였다. 비가 오는 궂은 날에 말들은 쉼 없이 내달렸고, 반대 주민들의 목소리도 그칠 줄 몰랐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