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 시기가 2012년이라는 점에서 대선에 활용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상황이다. 해킹 사건 이후 국정원의 대응 패턴 말이다. 이탈리아 보안업체로부터 해킹프로그램을 구입했다는 보도에 대해 강한 부인으로 일관했던 국정원은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나오자 북한을 끌어들이고 국익을 내세우는 전략으로 갈아탔다. 이른바 ‘물 타기’다. 의혹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 의미를 축소하기에 급급한 모습도 보였다.
국정원은 대선 개입 사건 때도 이랬다. 대선을 앞둔 지난 2012년 12월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 씨가 오피스텔에서 정치관련 댓글을 달고 있다는 의혹에 대해 국정원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몇몇 사이트에 김 씨가 작성한 댓글이 들통 나자 국정원은 “대북 심리전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언론보도 및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내용들이 드러날 때마다 국정원은 ‘직원 개인의 정치적 견해’ 등과 같은 다소 궁색한 핑계를 대 빈축을 샀다.
증거 인멸 논란도 어김없이 뒤따랐다. 해킹프로그램 운용에 관여했던 국정원 직원 임 아무개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증거를 삭제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컴퓨터 전문가로 알려진 임 씨가 충분히 복원이 가능할 것임을 알면서도, 더군다나 대북 정보였다면 굳이 지울 필요가 있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마찬가지로 2012년 12월 댓글을 달았던 여직원 김 씨는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급습한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노트북 파일 상당수를 지웠다.
정치권 반응 역시 ‘판박이’다. 여당은 국정원 엄호에 사활을 걸고 있고, 야당은 강도 높은 투쟁에 나섰다. 당연히 정국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지난 불법 대선 개입 사건 때 우리 당은 대선불복 프레임 때문에 그 진실을 규명하는 일을 하는 데 제약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불법 해킹 사건은 국민 모두가 피해자다. 우리가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같은 당의 이종걸 원내대표도 “당시 그것들(국정원 정치개입)이 감기였다면 지금 이것은 메르스 100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대표였던 김한길 의원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40일 넘게 노숙투쟁을 한 바 있다.
2013년 6월 25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모습. 이종현 기자
이처럼 너무나도 닮아있는 국정원의 2013년 대선 개입 사건과 최근의 불법 해킹 논란엔 숨겨진 일인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졌다는 것이다. 여권 핵심부가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친박계의 한 전직 의원은 “(대선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면서도 “시기가 묘해서 오해를 살 소지는 있는 것 같다. 여권이 진상규명을 위해 앞장 설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 역시 7월 20일 해킹과 관련해 “(국정원의) 자업자득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것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맨 것”이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그동안 정치권 주변에서는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와 국정원 특정 라인이 은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얘기가 끊이질 않았다. 이들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음지’에서 움직인 것 아니냐는 게 핵심 내용이다. 불법 해킹 사건 후 이러한 소문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속사정에 정통한 복수의 인사들로부터 그 진상을 살펴봤다. 다음은 캠프에 참여했던 한 원로급 인사의 전언이다.
“대선 주자라면 당연히 국정원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국정원은 다른 사정기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급정보가 넘치는 곳이다. 각 후보들 약점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다면 선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현직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국정원을 활용해 특정 후보를 낙마시킬 수도 있는데, 이를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채널도 만들 필요가 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중엔 국정원이 박 대통령 비리 자료를 수집해 만든 ‘박근혜 X파일’을 갖고 있다는 말이 파다했다. 우리로서는 국정원과 반드시 ‘핫라인’을 구축해야했다.”
재선의 한 친박 의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국정원의 몇몇 인사가 먼저 캠프 쪽으로 줄을 섰다고 귀띔했다. 그는 “국정원의 내부 상황과 겹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소수 인사들만이 해당할 것이다. 그들 때문에 묵묵히 일하는 대다수 국정원 직원들이 욕을 먹고 있다고 본다”면서 “지난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며 ‘MB맨’으로 꼽혔던 한 인사는 정권 말기가 다가오자 여권의 유력 주자였던 박 대통령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 퇴출 영순위가 될 것이란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지난 정권에서 ‘물을 먹었던’ 몇몇도 우리 캠프로 접근해왔다. 그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니 국정원이란 조직에서 정치적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선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고급 정보들을 우리에게 건네곤 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외곽 캠프를 이끌었던 한 친박 전직 의원은 국정원이라는 조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는 “통상 정권 말기로 접어들면 공직사회엔 ‘줄서기’가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그 중에서도 국정원과 검찰은 그 정도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정치 논리가 지배하는 기관이다. 정권 실세들이 대통령 임기 말에 줄줄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살아있는 권력 눈치를 보던 사정기관들이 미래권력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2년에도 박 대통령 핵심 측근들과 어떻게 해서든 라인을 만들려는 국정원 인사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치권이 먼저 자성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김태호 최고위원도 “정권 교체기마다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혹이 늘 있어왔다. 정치권의 책임이 더 크다”고 꼬집었다.
국정원 전직 간부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실력자들은 국정원을 사적인 도구로 활용하려 했다. 정권이 들어서면 요직에 먼저 자기 사람부터 심는다. 이래놓고 무슨 정치중립이 가능하단 말이냐. 정치권의 이러한 잘못된 인식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정원장과의 독대를 없앤 것에 대해 내부적으론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면서 “정치권에 줄을 잘 대거나 낙하산으로 내려온 직원들이 잘나가는 것을 보면 누구나 그러고 싶은 욕심이 들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