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염려하실 것이 아닙니다.”(김무성 대표)
“그래도 너무 세게 나가시던데…”(박근혜 대통령)
“그 정도는 해야 저의 진정성이 어필되지 않겠습니까.”(김)
“의원들이 대표께 줄을 죽 서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박)
“오픈프라이머리는 어렵습니다. 야당이 같은 날 해주지 않으면 의미도 없고, 오히려 역선택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당내 반발이 클 겁니다.”(김)
“명분을 축적해 ‘구악’을 벗어버리실 심산이시겠지요. 이해합니다.”(박)
“‘공천권을 국민에게 주겠다’는 제 이야기는 저에게도, 그리도 대통령님께도 윈윈하는 것입니다. 되도록이면 끝까지 이 기조로 가보고 안 되면 상향식공천으로 가겠습니다. 충분히 공간을 열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김)
“예, 믿겠습니다.”(박)
‘국회법 정국’ 이후 당청관계가 회복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속살은 ‘공천 전쟁’이라는 폭풍전야에 놓여있는 형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 16일 청와대에서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와 환담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이 대화는 상상력을 발휘해 쓴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독대 대본이다. 7월 16일. 박 대통령은 김 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는 충분히 오갈 법했다. 국회법 정국을 마무리하고 총선 공천에 대한 양측의 탐색전이 시작된 셈이다.
“당청이 찰떡같이 일하겠다. 코피를 쏟으며 일하겠다”는 원유철 원내대표에게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십니까”라고 덕담한 뒤, 35분가량 김무성 대표와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그들 곁에는 누구도 없었다. 이때 두 사람은 내년의 최대 정치이슈인 총선 공천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눴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공천이라고 하면 내공이 쌓일 대로 쌓인 만큼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양측의 공천에 대한 입장만큼은 확실하게 교환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김의 청와대 만남은 공식적으로는 ‘노동개혁’을 비롯한 우선추진과제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밝힌 시간이라지만 비공식적으론 20대 총선의 공천권에 대한 입장도 밝히는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난 거부권 정국 속에서 박 대통령과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싸움을 ‘공천권 다툼’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체제, 즉 ‘탈박’과 ‘비박’으로 대표되는 ‘K-Y체제’에선 친박계가 공천 확약을 받을 수 없는 탓에 박 대통령이 유 전 원내대표부터 ‘아웃’시키고 이후 김 대표를 겨눌 것이란 일종의 음모론이 크게 회자됐다.
유 전 원내대표가 직을 내려놓음으로써 일단락됐고, 이후 ‘당청 회동 및 독대→고위 당정청 회담→당정청 정책조정위원회(미정)’으로 당청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이지만 정가에선 지금을 ‘폭풍전야’로 보는 쪽이 많다. 박 대통령이 김 대표를 밀어주고,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을 잘 보좌할 것이라는 일종의 ‘불립문자’가 둘 간에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김 대표가 쥐고 있는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는 쉽게 말해 ‘체육관 예비선거’다. 본선거에 앞서 어느날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데 체육관을 빌려놓을 테니 유권자 여러분들이 직접 오셔서 후보를 선출해달라는 제도다. 유권자가 직접 뽑으니 공천헌금도 사라지고 내 사람 심기의 악행도 줄어든다는 훌륭한 취지다. 국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가 본선거에 나올 수 있도록 투표를 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식 오픈프라이머리는 고스란히 한국식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 치명적인 결함을 친박계는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오픈프라이머리를 하면 공천 받을 가능성이 턱없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일단 국민 참여를 기대할 수 없다. 휴일이 아니다. 돈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당원이나 대의원들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거 체육관을 찾게 된다. 출마 예상자들이 자신이 확보한 당원명부를 시도당위원장에 제출하느라 바쁜 이유다. 이들이 체육관에서 자신을 찍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령 당원이 등장하고, 당비 대납에다, 웃돈을 얹은 명부가 팔리고 있다.
물론 친박도 당원과 대의원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친박으로 봐선 신인보다는 ‘올드보이’들이 대거 나서는 것이 두렵다. 국회의원을 해봤던 이들, 특히 지난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던 친이계 일부 중엔 조직력도 있고 자금력도 있는 거물급이 존재한다. 친박계는 자신들을 재공천해주거나 전략공천해주길 바라고 있고 박 대통령이 그렇게 해줄 것이라 믿고 있다.
정가 사정에 밝은 한 정보통 인사는 “룰은 정하기 나름”이라며 이런 말을 해줬다.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 때 새누리당은 2배수, 3배수, 4배수 하면서 일부 후보를 컷오프시켰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3등 하고도 떨어지고 4등하고 붙는 경우가 있었다. 알 만한 이들은 다 안다. 오픈프라이머리가 안 되면 당원 50%와 여론조사 50%의 합산으로 공천이 돌아가는데 친박이 이 과정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 18대 국회에서 친박이, 19대 국회에서 친이가 그렇게 탈락하지 않았는가.”
박 대통령과 김 대표 간의 ‘공천전쟁’의 막이 올랐다고 보는 쪽에선 청와대가 당에게 내린 ‘노동개혁’이란 숙제가 만만찮다는 논리를 댄다. 김 대표는 “표를 잃더라도 노동개혁을 하겠다”고 벼르지만, 벌써 당내에선 총선이 코앞인데 표를 잃으면 어찌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점잖은 공무원보다 행동력이 앞서는 노동자를 다루기는 녹록잖은 일이다.
혹자는 누가 당의 ‘노동시장선진화특위’(이인제 위원장)에 들어가겠느냐고 펄쩍 뛴다. 한 초선 의원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도 무서운데 노동계 전체의 낙선운동이 펼쳐지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불편해했다. 올 연말까지 노동개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면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윈윈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김무성 책임론’이 일 수 있다. 한 정가 소식통은 “예단은 어렵지만 빅뱅은 필수”라며 “노동개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김 대표가 대표직을 유지하느냐 마느냐가 갈릴 수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박 대통령은 노동개혁에 일부 성공할 경우 ‘황교안발’ 사정정국이라는 다음 수도 가능하다는 말도 들린다. 박 대통령은 차기 총선에서 친박계가 살아남아야 레임덕을 최대한 미룰 수 있다. 퇴임 후에도 친박계는 안전판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김 대표로선 자신을 옹립할 세력이 있어야 미래권력을 꿈꿀 수 있다. 공천전쟁은 불가피하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