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그때 할아버지도 이야기를 듣는 나만큼 행복하지 않으셨을까? 할아버지 얘기에 눈을 반짝거리며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는 지극한 신도가 있었으니.
주향아, 나 죽으면 어떻게 울지 한번 울어봐라….
그것은 유언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내가 들은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여윈 얼굴로 환하게 웃으시며 다리를 주무르는 내게,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울 것이냐고 물으셨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의 유머 감각이었다. 그때 나는 멋쩍어 웃었고 할아버지는 내가 멋쩍어 하는 것을 보고 재밌어 하며 웃었다. 할아버지 가신 1987년 겨울, 나는 정말 펑펑 울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 할아버지가 가고 11년 후에 할머니도 가셨다. 그 후에 아버지도 세상을 떴다. 내게 울타리가 되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둘 떠났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 나도 가야할 곳, 그곳으로 갈 때 나는 편히 갈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사경을 한다. 연필로 또박또박 한 자 한 자를 쓰다 보면 그냥 훌쩍 읽고 지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한 만큼 음미하게 된다. 요즘 사경하고 있는 <초발심자경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三日修心千載寶 3일 동안 마음을 닦는 것은 천 년의 보배요,
百年貪物一朝塵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다.
3일 동안 마음을 닦는 일이 백 년 동안 재물을 쌓아두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겠다.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물론 살면서 돈은 필요하다. 돈은 먹고 살기 위해서뿐 아니라 각박해지지 않기 위해서도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그것은 관계의 윤활유고, 때로는 물질로 표현되는 마음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돈을 탐하며 살 일은 아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티끌이 되는 시간이 오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재벌이라도 온 그대로 빈손으로 가야 하는 그 시간이 온다. 마침내 오고, 빠르게 온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검은 옷의 예를 갖추고 남의 장례식장을 자주 찾아가면서도 우리도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죽은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병이 있어서, 사고로 죽은 것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문상한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은 빠르게 흐르고, 내 사진이 거기 장례식장에 걸려 있게 되는 시간이 온다. 그 시간에 나는 평정을 찾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처럼 유머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가 말했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고 한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오늘 하려던 그 일을 할 것인가. 죽음 명상은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거둬들이게 해준다. 다시 내게 묻는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