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최고위원이 7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최근 자살한 국정원 직원의 마티즈 차량 도로 CCTV 촬영 모습(왼쪽)과 경찰의 재연시험 CCTV 촬영 모습이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 빨라도 너무 빠른 실종신고·수색
국정원 직원 임 아무개 과장(45)과 관련한 첫 번째 의혹은 유족의 신고 시점이다. 7월 18일 오전 5시께 집을 나선 임 과장에 대한 실종 신고가 지나치게 빨랐다. 임 과장이 집을 나선 지 5시간이 지난 오전 10시께 임 과장의 부인은 경찰이 아닌 119로 “남편이 부부싸움을 하고 나갔는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실종신고를 했다. 임 과장이 아침밥을 먹지 않고 “출근한다”며 나간 뒤 오전 8시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전화를 받지 않자 오전 10시께 신고를 했던 것. 업무를 위해 새벽에 일찍 출근한 남편이 5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된다며 119에 실종신고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소방당국은 신고 접수 후 불과 2시간이 지난 이날 정오 무렵 사망한 임 과장의 사체를 발견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실종신고 자체를 48시간이 지나야 받아준다. 직장인이 새벽에 나갔고 자살 암시도 없었는데 그 시각에 실종신고를 했다는 것부터 납득이 어렵다”며 “보통 실종신고가 오더라도 정황을 듣고 좀 더 연락해보고 다음날 오라고 하거나 가출인 신고를 받고 만다. 또한 발견 시점과 관련해서도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기 전에는 그렇게 빨리 발견하기 힘들다. 모든 게 너무 일사천리”라고 말했다.
사체 발견 이후 국정원과 경찰도 빠른 대응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임 과장이 사체로 발견된 지 하루 만에 국정원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직원일동 명의의 ‘동료 직원을 보내며’라는 추모 공동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20일 경찰은 “전형적인 자살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곧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서둘러 단순 자살로 결론짓는 모양새를 보였다. 경찰은 임 과장이 20여 년을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서 근무한 간부였고, 문제가 되는 해킹 프로그램 구입의 실무자로 추정되는 상황이었음에도 단지 유서가 있고 외부침입 흔적이 없다는 이유로 단순 자살로 판단했다.
# 논란 키운 ‘삭제·복구’ 해명
전산전문가인 임 과장이 단순히 ‘딜리트(Delete·삭제)키’로 해킹 프로그램 관련 자료를 지웠다는 것도 논란에 휩싸였다. ‘디가우징(자기장을 가해 하드디스크를 훼손하는 방법)’ 등 특수한 방법으로 관련 자료를 삭제해 복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야당 일각의 주장에 대해, 국정원은 ‘해당 직원은 단순히 키보드 자판의 딜리트 키를 이용해 자료를 지웠기 때문에 완전 복구가 가능하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지면서 오히려 논란을 키웠다.
국정원 국장 출신이자 국회 정보위 여당 간사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은 23일 “숨진 국정원 직원이 단순히 삭제 버튼을 누르는 방식으로 자료를 삭제해 복구가 쉬웠으며 현재 절반 이상 복구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회 정보위 야당 간사인 신경민 새정치연합 의원은 이날 “사망한 국정원 직원은 국정원 내규상 삭제 권한이 없고, 이미 지난 4월 다른 부서로 전출한 상태였다”며 “임 과장이 자료를 삭제했다고 가정해 본다면, 권한도 없는 직원이 어떻게 삭제했는지 의문이다”고 공세를 폈다.
한 시사평론가는 “전문가인 임 과장이 복구가 쉬운 ‘딜리트 키’를 이용해 파일을 지웠다고 삭제에 책임을 느끼고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또한 국정원 해명대로라면 임 과장이 삭제한 파일은 몇 시간이면 복구가 가능하고 이것을 국회 정보위원들에 공개하면 되는데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정원이 자료를 선별해 공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7월 19일 경기 용인동부경찰서에서 국가정보원 불법 해킹 의혹 뒤 사망한 국정원 직원의 유서를 공개했다. 연합뉴스
# 카드 결제 내역만 확인
경찰이 임 과장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조사하지 않고 서둘러 수사를 마무리한 배경에 대해서도 부실 수사 의혹이 일었다. 경찰은 변사사건이 자살로 밝혀질 경우 유족 조사 등을 거쳐 그 배경 수사를 진행한다.
임 과장이 CC(폐쇄회로)TV에 마지막으로 포착된 것은 18일 오전 6시 22분 용인시 이동면의 한 마을 입구에서였고, 시신이 발견된 곳은 이곳에서 1.4㎞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사망 시각은 오전 10~11시로 추정되기 때문에 약 4시간 동안의 행방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임 과장의 사인과 집에서 나온 시각, 인근 마트에서 소주 등을 산 카드 결제내역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부검 후 하루 만에 타살의 흔적이 없다며 사실상 수사를 종결한 경찰은, 국정원 직원이란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자살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단서인 통화내역 조회조차 하지 않아 비판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유족 측도 더 이상의 수사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변사사건과 같이 수사를 종결함에 따라 조사하지 않았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다.
# 번호판 녹색? 흰색?
임 과장이 사망 당일 이용했던 마티즈 차량이 바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논란은 더욱 커졌다. 논란은 18일 오전 6시 22분 마지막으로 찍힌 임 과장 마티즈 차량에 대한 CCTV 영상 속 차량 번호판 색깔이 현장에서 발견된 녹색이 아닌 흰색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전병헌 새정치연합 최고위원도 22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경찰이 제출한 CCTV에 담긴 국정원 직원 마티즈 차와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차의 번호판이 다르다는 지적, 즉 ‘차 바꿔치기’ 의혹을 제기했다.
전 최고위원은 회의에서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살 현장에서 발견된 마티즈 승용차의 번호판은 초록색”이라며 “반면 해당 요원이 차를 운행한 사진이라면서 경찰이 언론에 배포한 CCTV 사진을 보면 번호판은 흰 색”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CCTV에 담긴 국정원 직원 마티즈 차는 가로가 길고 세로가 좁은 신형 번호판이고, 자살 현장 차는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구형 번호판”이라며 “CCTV 속 차에는 범퍼보호 가드가 있는데, 자살 현장 마티즈에는 이 가드가 빠져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경찰이 부랴부랴 정밀분석에 나섰다. 경기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는 23일 오후 언론 브리핑을 갖고 “전혀 가능성 없다”며 ‘차 바꿔치기’ 의혹을 일축했다. 경찰 측은 “(의혹이 제기된) 동영상을 초당 30프레임으로 나눠보면 차량 진행에 따라 동일한 번호판이 밝은 색 또는 어두운 색으로 변화하는 것이 관찰된다”며 “동종차량(1999년 식 빨간색 마티즈·녹색 전국번호판)으로 같은 시간대 재연 실험을 10여 차례 해보니 실제로 녹색 번호판이 흰색으로 왜곡, 변형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논란이 된 영상은 임 과장이 사망 직전인 18일 오전 6시 18분과 22분, 사망 장소에서 각각 2.4㎞와 1.4㎞ 떨어진 지점에 설치된 CCTV에 찍힌 것들로, 이들 CCTV는 각각 34만, 41만 화소의 저화소 카메라들이다. 경찰이 실험차량의 주행 모습을 촬영했을 때 임 과장 차량과 마찬가지로 번호판은 흰색으로 나왔고, 정지 상태나 저속 운행 시에도 번호판은 흰색으로 보였다. 같은 위치에서 고화질 카메라(150만 화소)로 실험차량을 찍었을 때만 원래대로 차량 번호판이 녹색으로 보였다. 경기경찰청은 차량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 자문도 구했다고 강조했으며, 더욱 정밀한 분석을 위해 동영상을 국과수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고 밝혔다.
# 브리핑 이전 차량 폐차돼
경기경찰청의 브리핑이 있었던 23일 밤 임 과장의 마티즈 차량이 이미 22일 번호판을 반납하고 폐차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사건 은폐 의혹마저 일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자동차 등록 원부를 바탕으로 지난 2005년 처음 등록돼 임 과장 구입 시까지 주행거리가 21만9149㎞였던 이 차량은, 7월 2일 임 과장으로 명의가 이전된 뒤 정확히 1000㎞를 더 달려 폐차 때까지 22만149㎞를 기록했고, 구입한 지 20일 만에 폐차했다고 밝혔다. 경찰이 ‘바꿔치기가 없었다’는 발표를 할 당시 이미 해당 차량은 폐차가 된 상태였던 셈이다.
경찰 측은 “사건 당일 차량을 감식한 후 유족에게 차량을 찾아가라고 통보했다”며 “며칠 뒤 유족들이 폐차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경찰이 관여할 사항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경기경찰청 관계자는 “(국과수 감정 의뢰 결과가) 오늘(24일) 오전 중에 나온다”면서도, ‘23일 브리핑 당시 마티즈 차량의 폐차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담당자가 모두 자리를 비워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2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결국 경찰 손을 들어주며 ‘차 바꿔치기’ 의혹을 일단락시켰다. 임 과장 차량과 CCTV에 촬영된 차량에 대한 감정 결과 경찰 분석과 마찬가지로 동일 차량으로 확인됐다고 밝힌 것. 국과수에 따르면 감정에서 두 차량의 개조(튜닝) 특징 등이 공통적으로 발견됐고 일부 차량 번호가 유사하게 관찰됐다. 국과수는 24일 “지난 18일 오전 용인시 이동면 버스정류장 앞에서 CCTV로 촬영된 마티즈 차량이 숨진 국정원 직원 임 아무개 씨의 마티즈 차량과 다르다고 볼 만한 특징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CCTV에 촬영된 차량 번호판이 녹색이 아닌 흰색으로 관찰된 것에 대해서는 “차량번호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해상도 영상에서 좁은 계조 범위, 밝은 색 부분이 더 두드러지는 환경, 손실 압축을 사용하는 영상 저장방식의 특성상 색상왜곡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국정원 4급 간부인 임 과장이 최근 갑자기 출고 16년 된 경차인 마티즈 차량을 구매했고 구매 후 한 달 만에 자살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마티즈가 경차로 차량 10부제의 적용을 받지 않아 구매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