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바이러스’에 걸린 직장인이 늘고 있다. 이들은 일에 대한 목표도 열의도 없이 그저 시키는 일만 조용히 처리하고 업무 시간의 절반은 딴 생각을 하며 보낸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3년차 직장인 이 아무개 씨(여·29)는 ‘좀비’ 상태에 빠진 지 벌써 4개월째다. 손에 꼽히는 대기업에서 일하며 또래에 비해 적지 않은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왜 회사를 다니나’ 하는 고민 때문에 진지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이 씨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부서에 처음 발령 받아 당황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했다”면서도 “지난 인사이동에는 팀을 옮겨 최악의 팀장을 만났다. 신입사원의 열정은 이제 없고, 노력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 괴롭다”고 토로했다.
이 씨와 같은 고민을 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조기 퇴사 경험서’들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올 만큼 2030 세대의 퇴사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원대한 꿈을 갖고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통과했지만 현실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이다. 직장생활의 민낯을 직면하는 순간 바로 옆자리에서 좀비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는 선배가 눈에 들어온다. 몇 년 후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결국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흔히 ‘3년차 증후군’이라고 불렸던 퇴사 고민 주기도 짧아지고 있다. 입사 3년이 채 안 된 신입사원들도 퇴사 고민을 하다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늘었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의 조사에 따르면 조기 퇴사자(신입사원 중 1년 이내 퇴사한 사람) 비율이 10명 중 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 신입사원은 35.8%, 대기업은 18.8%가 1년 이내 퇴사했다. 퇴사자들은 ‘직무와 맞지 않아서’를 퇴사 이유 1순위로 꼽았다. 반면 기업은 ‘책임감, 인내심이 없어서’ 신입사원들이 퇴사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2030 직장인의 방황에 대해 어려워진 취업시장과 젊은 세대의 특성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퇴사컨설턴트 손성곤 작가(39)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어렵게 회사에 입사했기에 방황하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며 “회사만 들어오면 모든 게 풀릴 것 같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직장생활 컨설팅 업체 ‘윤정용연구소’의 윤정용 소장(34)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한 ‘얕은 조언’을 의지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유다. 진지하게 문제를 함께 고민해줄 사람들을 찾는 대신 SNS를 통해 얻은 ‘값싼 공감’으로 퇴사를 결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정용 소장 역시 굴지의 기업에 다니다 조기 퇴사한 경험이 있다. 입사할 땐 본인도, 가족들도 만족했지만 직접 부딪친 회사 생활은 대기업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만족할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처음부터 맡게 됐고, 상명하복의 분위기 속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독버섯처럼 번졌다. 윤 소장은 “회사를 때려치우면 좀비 생활에서 벗어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없는 퇴사자는 좀비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조언했다.
손성곤 작가는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는 얘기를 한다”고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직장인들처럼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열성적으로 추진하고, 성과를 내며 보람을 느끼는 회사생활을 꿈꿨지만 현실은 다르다.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게 업무의 대부분이다. 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손 작가와 윤 소장은 “어떤 일이든 ‘반복의 절대량’이라는 게 있다. 큰 프로젝트를 맡을 때까지 숙련기간이 필요한데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도, 목표도 없이 회사를 다니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좀비 바이러스에 빠지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이다. 내 능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비효율적으로 일을 시키는 팀장이 짜증나서, 선배가 쓸데없이 괴롭혀서 등 갖은 상처를 받고 퇴사를 고민한다. ‘이런 사람들과 내가 일해야 하나’라는 자괴감이 몰려오며 어떤 일을 시켜도 부정적이 된다. 윤 소장은 “상사가 밑도 끝도 없이 ‘다시 해와’라며 보고서를 던지면 보통의 사원들은 그 앞에선 군말 없이 ‘네’라고 답하고 자리에 와서 별에 별 욕을 다 한다. 결국 어떤 개선도 없이 이런 대화를 반복하다가 열정은 자연스럽게 식어버리게 된다”며 “대화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라”고 조언했다.
사라져버린 열정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새로운 돌파구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공공기관 직원 정 아무개 씨(여·28)는 “회사 생활 6개월 만에 ‘지겹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평소 몸을 쓰는 걸 좋아해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했다. 돈을 모아 자전거 장비를 마련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주말에 3~4시간씩 자전거를 타니 자연스럽게 회사 생활에 균형도 찾았다”고 말했다. 윤 소장은 “회사 밖에서 자기계발의 도구를 찾아야 한다. 강연을 듣는 것도 좋고, 취미를 만드는 것도 좋다”고 설명했다. 직장 내부에서 ‘동력’을 얻을 수 없다면 외부에서 끌어들이라는 얘기다.
손 작가는 “흰 종이에 내가 되고 싶은 모습,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부분, 오늘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것 등 세부적으로 나눠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적어가는 과정을 통해 열정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결국엔 치열한 자아에 대한 고민이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조기퇴사 막으려면 상사는 어떻게 해야하나 섣부른 조언보다 한마디 위로를… # 커뮤니케이션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두운 얼굴로 면담을 요청하는 팀원은 팀장들에게 공포 그 자체다. 하지만 면담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하지 말라. 대화 요청이 있을 땐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라. 그렇다고 “나 때는 안 그랬는데”로 시작하는 섣부른 조언은 금물이다. 공감과 지지를 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한 때다. “네 맘 이해한다”, “나도 그 시기에는 힘들었는데 이렇게 극복했다”는 등의 진정성 있는 말 한 마디가 마음을 돌린다. # 업무에는 적절한 피드백을 하라 일체 설명 없이 “다시 해와”라고 팀원을 다그쳤는가. 바로 그런 태도가 팀원의 퇴사를 부른다.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면 어떤 점이 부족하고, 어떤 점은 잘 됐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피드백을 해주는 게 중요하다. 요즘 젊은 세대는 비합리성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한다. 합리적인 피드백은 업무 효율을 높이고, 신입사원에게 성취감을 안겨준다. # 의외의 장소를 노려라 구구절절한 조언보다 “힘들지?” 한 마디가 힘이 될 수 있다.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시하는 게 요즘 세대다. 모두가 있는 사무실보다는 의외의 장소가 더 효과적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차 한 잔을 따로 사주며 건네는 짧은 한 마디 위로가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이 될 수 있다. # 술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회식하며 술 한 잔 하면 풀리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려라. 마음이 닫힌 후배에게 잦은 회식은 당신을 ‘꼰대’로 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술김에 대충 얼버무리는 위로는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한다. [서] |
퇴사 잘하는 법 목적지 결정했다면 ‘주단위 실천계획’ 세워라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찾는 게 첫걸음이다. 윤정용 소장은 “퇴사 성공사례를 보면 하고 싶은 게 뚜렷했던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커리어를 활용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금상첨화”라고 설명했다. 강연회, 동호회 등 사람을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가능하면 아예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흥미를 찾는 게 좋다. 물론 원하는 퇴사 방향을 찾을 때까지 직장생활은 유지하는 게 현명하다. 학업, 창업, 이직 중 선택지가 정해졌다면 가능한 구체적으로 ‘퇴사 계획서’를 만들어야 한다. 손 작가는 “연 단위에서 월 단위, 다시 주 단위로 세부적인 실천계획을 세워라”고 충고했다. 실천계획이 구체적일수록 목표에 다가갈 가능성은 높아진다. 자신의 ‘미래’를 만나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퇴사 후 커피숍을 차리고 싶다면 이미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보라는 조언이다. 자신이 겪게 될 현실이 무엇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보다 현명하게 퇴사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면 마무리도 멋지게 해야 한다. 윤 소장은 “회사를 나올 때 사람들과 관계를 잘 정리하지 못했던 게 후회된다”고 경험담을 전했다. 창업을 하든, 이직을 하든, 지금 직장 사람들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예의 있는 퇴사’가 중요하다. 윤 소장은 “아는 분은 회사 카페에 ‘퇴사 기념으로 쏜다’고 배너를 세워 직원들에게 커피를 돌리고 나왔다. 직원들에게 참 좋은 인상을 남긴 사례였다”고 설명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