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한 9단은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바둑을 두고 있다. 오른쪽은 복부 수술을 미루고 대국을 강행한 나현 6단. 링거 주사바늘 자국을 가리기 위해 손등을 붕대로 감았다.
최 9단의 1000승은 통산 전적이 아니라 ‘바둑리그’에서만 올린 것이고 최초인 것. 바둑리그의 전신인 한국리그 출범이 2003년이니까 12년만의 결실이다. 조훈현 9단의 2000승 돌파나 서봉수 9단은 2000승 접근 같은 ‘생애 통산 적적’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평가될 기록이다. 최 9단은 얼마 전에 발목을 다쳐 요즘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다닌다. 한 달이 넘은 것 같은데, 꽤 오래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몸을 하고도 온 동네 다 다니고 있다. 중국에 건너가 리그 바둑도 둔다.
나현 6단은 급히 복부 수술을 해야 했던 상황에서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링거를 맞아가면서 바둑을 두었고, 이겼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일견 궁지에 몰린 듯했던 장면에서 묘수 일발을 터뜨리며 소속 팀 포스코켐텍의 승리를 견인했다.
<1도>가 ‘탈장 묘수’의 현장. 백이 나현 6단, 상대는 CJE&M의 박승화 6단. 흑1,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 그러나 사실은 아주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그런가? <2도> 백1로 이으면? 흑2-4로 우변 백 대마를 잡으러 가는 수가 있다.
계속해서 <3도> 백1에는 흑2-4로 몰고 잇는다. 백5로 찝으면? 6의 곳에 두어 한 집을 내는 수와 7의 곳을 끊어 잡는 수가 맞보기여서 사는 것 아닌가? 아니다. 지금은 주변 상황이 흑에게 너무 좋아서 흑8로 돌려치면서 파호하는 수가 있어 백이 잡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도> 흑1에 백은 <2도> 1로 잇지 못하고 <4도> 백1에 두어 우변 대마를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백이 우변을 살리면 흑은, 이번에는 하변 백 대마의 둥지 속에서 2로 준동하며 또 다시 생사를 묻는다. 하변 백 대마는 3으로 내려서 궁도를 넓히고 흑이 4의 곳을 막을 때 5로 마늘모하는 가착이 있어 살려고만 하면 별 걱정은 없다. 그러나 흑은 <5도> 1-3으로 백2-4를 유도해 놓은 후 5로 이쪽 백돌을 끊어 잡는다. 이게 선수. 백은 6의 곳을 이어야 한다. 잇지 않으면? 흑이 6의 곳을 끊는다. 그래서 백은 양자충. 기껏 <4도> 백5 같은 가착을 두고도 도로 잡혀 버리는 것. 아무튼 <5도>처럼 되어서는 백이 이기기를 바라기는 어렵다는 것이 검토실의 형세 분석이었다.
나 6단이 불굴의 투혼을 발휘하며 중반까지는 힘차게 국면을 이끌어 나가는 모습에 크게 힘을 냈던 포스코켐텍은 “여기까지인가?”라면서, 환자 나현에게 더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 나 6단은 단숨에 전황을 뒤집는 기막힌 묘수 한 방을 작렬시켰다. <6도> 백1의 한칸뜀이었다. 응원석과 겁토실은 잠깐 침묵에 잠겼다. 뭐지?
<7도> 흑1-3으로 찌르고 차단하면? 백4로 내려서는 것이 선수다. 흑5로, 백이 넘어가는 것을 방비하면 백6으로 하변 대마를 살린다. 흑7-9로 우변 백 대마에 덤비면? 백10으로 사는 것. 흑A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은 흑A가 선수는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사실.
<8도>처럼 흑1-3로 차단해 <7도> 백4를 없애면? 이번에는 백4로 우변 백 대마를 살린다. 흑5-7로 이쪽을 끊어 잡으면? 백8로 하변 백 대마도 산다. 코너에 몰린 것 같았던 나 6단이 복부의 통증 속에서 찾아낸 기사회생의 묘수였고, 나현의 분전, 나현의 묘수에 다시 용기백배한 포스코켐텍은 4 대 1로 이겼다.
‘부상 투혼’이나 ‘투병 투혼’이라면 조치훈 9단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1986년 정초였으니 꼭 30년 전이다. 기성전 도전7번기 개막이 며칠 안 남았을 때였다. 타이틀 보유자는 조치훈 9단, 도전자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 조 9단은 기보를 놓아보며 컨디션을 조절하다가 밤 깊은 시간에 바람도 쐴 겸, 요기도 할 겸, 집을 나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온몸이 부셔졌다. 진단은 자그마치 전치 6개월이었다. 그 몸으로 조 9단은 “머리와 오른팔을 다치지 않아 바둑을 둘 수 있다. 쓰러지더라도 바둑판 앞에서 쓰러지겠다”는 말로 출전 의사를 밝혔고, 주최사 ‘요미우리신문’이 제공한 전용기를 타고 결전의 장소로 날아갔다. 물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의료진이 동승했다. 휠체어에 앉아 바둑을 두었다.
일본 언론이 전한 대국 사진은 기괴했다. 조 9단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고바야시 9단은 몇 겹 포개놓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게다가 대국 당시 고바야시 9단은 머리가 밤송이 같아 기괴한 분위기를 더했다. 고바야시 9단은 기성전 도전기 직전에 있었던 ‘일-중 슈퍼대항전’에서 패한 자책으로 후지사와 슈코 9단, 가토 마사오 9단과 함께 삭발을 했는데, 그 머리가 조금 자라 있었다.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은 조치훈, 밤송이머리의 고바야시, 그 정경은 ‘그로테스크 명장면’으로 바둑사에 길이 남았다. 어쨌거나 이제는 바둑도 스포츠니 부상 투혼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