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청자 주병, 뱀모양 장식의 가야토기, 청화백자 매병. 하버드대학은 비취빛이 은은히 감도는 청자 주병에 대해 아마도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 최고의 색깔일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뱀모양 장식의 가야토기는 인상적인 균형미와 강건함, 구조상의 미, 균형 잡힌 삼각 세공이 돋보이는 걸작이다. 사진출처=하버드대학
헨더슨은 한국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조각가인 아내 마리아 헨더슨도 거들었다. 미국에 줄을 대거나 비자를 받으려는 고관대작들로부터 문화재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소설가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를 보자.
맞은편 책상 위에는 작은 금동 불상 곁에 몇 개의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다. 십이 폭 예서(隷書) 병풍 앞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도 세월의 때 묻은 백자기다. (중략) 그는 자기가 들고 온 상감진사(象嵌辰砂) 고려청자 화병에 눈길을 돌렸다. (중략) 브라운 씨가 나오자 이인국 박사는 웃으며 선물을 내어 놓았다. 포장을 풀고 난 브라운 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기쁨을 참지 못하는 듯 ‘쌩큐’를 거듭 부르짖었다… (1962. 7 <사상계> 109호)
주인공 이인국 박사가 미국으로 이민가려고 미 국무부 직원에게 고려청자를 뇌물로 바치는 대목이다. 소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브라운 씨가 바로 헨더슨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고은 시인이 <경향신문>에 쓴 글을 보자. 1993년 고은은 헨더슨의 초대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집에 우리 문화재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그곳은 또 하나의 덕수궁 박물관이었던 것이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사회의 토기등속도 엄청나게 수집되어 있었다. (중략) 한갓 대사관 문정관이 개인의 취미로 수집한 문화재가 하나의 박물관을 차릴 만한 규모로 모여질 수 있는 것은 첫째 그들에게 한걸음이라도 다가서기 위한 친미파(親美派)의 ‘선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93. 1. 31 <경향신문>. ‘나의 山河, 나의 삶’)
신라의 뿔잔과 받침대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예술품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형식으로 기마 유목 문화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사진출처=하버드대학
1970년대 한국에서 헨더슨의 수집품들의 밀반출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밀반출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헨더슨은 한국인들이 한국 문화재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이를 사랑하고 연구해온 자신이 훨씬 더 한국의 도자기와 미술을 존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 문화재를 돈벌이에 이용한 것은 분명하다. 1969년 전시회가 끝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자기들 소장품을 100만 달러에 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1988년 헨더슨이 사망하자 도자기 143점은 하버드대학에 기증되었다. 하버드대학 아서새클러미술관에 소장된 도자기들은 1991년 단 1회 대중에 공개되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하늘아래 최고(First Under Heaven)–한국도자기컬렉션”이었다. 그 중에는 낙랑시대의 작품 1점, 김해 2점, 백제 3점, 가야 10점, 신라 29점, 고려시대의 음각·양각·상감청자 36점, 조선시대의 분청·백자·청화백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무엇보다도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한국도자기사의 연구에 중요한 연구 컬렉션(studycollection)이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은 2009년부터 꾸준히 헨더슨 컬렉션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부라도 반환하고자 힘썼다. 혜문스님은 헨더슨 소장품 가운데 ‘안평대군 글씨’ 등 일부가 경매에 붙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의 작자다. 그는 “헨더슨 컬렉션의 일부나마 본국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스스로 팔아먹은 문화재’에 대한 죄의식 같은 것을 좀 더 정직하게 털어낼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미국에 소재하는 우리 문화재의 수는 1만 1140점에 이른다. 우리 스스로 내어준 문화재를 되찾는 길은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여 나라 밖의 모든 문화재를 골고루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