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박물관의 주 전시관 가운데 하나인 북쪽 전시관을 ‘드농관’이라 부른다. 초대 박물관장인 도미니크 비방 드농(Le Baron Dominique Vivant Denon, 1747~1825)의 공적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드농은 유례가 없는 문화재 약탈자였다. 나폴레옹이 해외원정을 떠날 때마다 동행하면서 문화재를 선별하고 반출했다. 나폴레옹과 드농이 이집트에서 약탈해간 문화재 가운데 하나가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탑인 평양 율리사지 팔각5층석탑. 현재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 방치돼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제자리찾기
드농이 박물관장이라는 미명하에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라면 사업과 자선활동을 앞세워 한국 문화재를 약탈한 이도 있다. 일본 5대재벌이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이다. 일본 오쿠라 그룹의 창업주이며 일본에서는 학교와 박물관 설립에 노력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도쿄경제대학과 선린상고(현재 선린인터넷고)의 설립자다. 일전에 소개했던 오구라컬렉션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와는 다른 인물이다(그럼에도 여러 문헌이나 언론보도 등에는 아직도 두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도쿄의 미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오쿠라 호텔에는 그가 1917년에 세운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 ‘오쿠라 슈코칸(大倉 集古館)’이 있다. 당시 그는 이곳에 소장된 약탈문화재를 일반에 공개했다. 한국 미술품이 무려 3692점, 서적이 1만 5000여 권이었다.
현재의 슈코칸 건물은 관동대지진 당시 모두 소실되고 1928년 재건한 것이다. 관동대지진의 화마 속에서도 일부 석물들은 화를 면했다. 현재 슈코칸 입구 양쪽으로 금동옥녀 입상이 놓여있고, 정원에는 양 모양 석조와 화표(華表·능묘 전방에 세우는 한 쌍의 석주)가 있다. 이들 모두 조선시대 능묘를 지키는 신성한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천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석탑이 나란히 호텔 뒤쪽에 놓여 있다.
이천오층석탑은 경기도 이천시 이천향교 인근 폐사지(현 양정여중 자리)에 있던 높이 6.48m의 쌍둥이 5층 석탑이다. 고려 초기 문화재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췄다고 평가된다. 평양 율리사지 팔각5층석탑은 평남 대동군 율리사지에 있었던 고려 중기의 석탑이다. 높이는 8.7m. 탑의 기단부에 무늬장식을 하고 위아래로 연꽃무늬를 베풀어 기단을 불상대좌와 같은 형태로 꾸미고 있다. 탑신부는 5층으로 올려 다각다층의 길쭉한 형태다. 이런 형태의 탑들은 한강 이북 중에서도 평양 인근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로 월정사 8각9층탑과 함께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으로 꼽힌다.
이천 오층석탑은 이천 시민들이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으나, 평양 율리사지 석탑은 원 소재지가 북한이어서 그동안 반환 운동이 본격화되지 못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운동(대표 혜문스님)이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운동을 시작했고 지난 2014년 12월 북측의 조선불교도연맹(서기장 차금철)도 반환운동 추진에 동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혜문 스님은 조선불교도연맹의 위임을 받아 석탑의 소유자로 돼 있는 오쿠라문화재단 대표를 상대로 석탑 반환을 요구하는 조정신청서를 도쿄간이재판소에 제출했다. 지금도 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1934년 일제 경성부가 출간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경복궁 7225간 중 약 4000간이 철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000간은 건물 200여 채에 해당된다. 그 중 세자가 기거하던 ‘자선당(慈善堂)’은 1903년 해체되어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오쿠라의 저택으로 옮겨졌고, 오쿠라 쇼쿠칸 ‘조선관’으로 사용되었다. 오쿠라의 문화재 욕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조선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추락시키고자 한 일제의 노력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자선당’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됐다. 석축과 기단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3년 한 건축학과 교수가 발견했다. 꾸준하게 반환 노력을 해서 1995년 12월 28일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화재로 인한 손실로 석축과 기단은 자선당 재건의 소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고국에 돌아왔어도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었던 문화재는 결국 사라진 거나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경복궁 재건사업으로 자선당은 원래 있던 곳에 새로 세워지기는 했다. 하지만 건축물의 형태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자선당이 철거되지 않고 자기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그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