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던 금전벽우(金殿碧宇)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山中)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 ‘장안사’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본 가곡 ‘장안사’ 가사다. 장안사(長安寺)는 강원도 금강산 내금강 지역 사찰이었다. 금강산 장경봉 아래 절경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힌다. 6·25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비홍교 건너편에 절터만 남아 있다. 장안사는 조선시대에는 화가 이정의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림에 등장한다. 겸재 정선(鄭敾)과 김윤겸(金允謙)도 장안사를 그림으로 남겼다. 8세기에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이 우리나라의 금강산으로 해석되면서부터 금강산은 불교의 성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고려 후기 원나라 사신들까지 금강산에 들러 해마다 큰 불교 행사를 벌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1346년 주조된 장안사 종은 1906년 일본인 승려에 의해 중국 다롄으로 옮겨졌다. 사진제공=시사저널
1346년 중국 원나라 순종(順宗)은 고려출신의 왕후인 기(奇) 씨(드라마에도 종종 등장하는 그 기왕후다)가 왕자를 낳자, 왕자와 황제의 수명장수를 빌고자 장안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고려에 파견된 원나라 장인이 금강산 장안사에서 범종을 주조했다. 이런 기록은 개성 남대문에 걸려 있는 연복사(演福寺) 신주종(新鑄鐘)에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을 옮겨 보자.
“1346년 원나라 순종의 명을 받은 강금강(姜金鋼)과 신예(辛裔)가 금강산 장안사에서 범종을 만들고 귀국하는 길에 고려 충목왕(忠穆王)과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요청으로 연복사의 종을 주조했다.”
장안사 범종인 이 기복종(祈福種)은 종신의 높이가 2.2m, 종입의 직경이 1.35m, 무게가 1.67t에 달한다. 아랫단을 수평으로 처리한 한국 불종과는 달리 연잎을 본떠 물결 모양으로 처리한 전형적인 중국 불종 양식을 취하고 있다. 종의 표면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나라 황실이 티베트불교를 신봉한 까닭이다. 중국에서는 장안사 종이 원대 불종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하고 있다.
1906년 한 일본인 승려가 이 종을 다롄으로 옮겼다. 뤼순박물관 안내문에는 반입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포교를 위해 일본인 승려 아베에이젠(阿部榮全)을 다롄에 파견했고 히가시혼간지(東本愿寺)를 세운 이듬해인 1906년 인천을 통해 이 종을 들여왔다.”
왕쓰저우(王嗣洲) 뤼순박물관 연구실 주임도 <대련만보>(大連晩報)와의 인터뷰에서 “원 순제(順帝·순종)가 1346년 사신과 장인을 보내 조선의 금강산에서 주조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종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에도 계속 사찰에 걸려 있다가 1958년 다롄 노동공원 구내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2007년 3월 보존을 이유로 뤼순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2008년 6월 뉴스보도를 통해 기복종의 존재가 알려진 뒤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스님)는 이 종의 반환을 모색해왔다. 원래 자리였던 북한의 금강산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북한 조선 불교도연맹과도 수차례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앞으로도 구체적인 반환 운동 방안을 협의할 계획이다. 2011년 11월 뤼순박물관을 방문해서, 반환요청을 했으나 박물관 측은 “기복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중국에 들어왔는지 잘 알고 있다. 중국은 국제 법률과 관례에 따라 처리하겠지만 이 문제는 외교 루트를 통해 협의돼야 할 일이다”라며 즉답을 피했다. 혜문스님은 “중국도 프랑스 등에 문화재를 침탈당한 아픈 역사가 있는 만큼 결국 기복종이 고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중국이 항일 전통을 이어간다는 상징적인 측면에서 반환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는 엄청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는 막대한 물품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은 워낙 유물의 규모가 방대하다. 기록도 불분명하여 실태 조사 자체가 어렵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이 중국내 우리나라 문화재를 약 8200여 점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문화재의 반환이 이루어진 사례도 없다. 길고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장안사 종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쪽으로도 눈을 돌려야 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참고문헌 문화재제자리찾기 홈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