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식사정치’를 재개할 것으로 알려지자 새누리당 일각에선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와 오찬을 갖기에 앞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얼마 전 여의도엔 새누리당 의원 성향을 분석한 정체불명의 파일이 은밀히 돌았다. <일요신문>이 직접 확보한 파일에는 의원들 160명 이름이 나열돼 있었고, 그 옆엔 친박 비박 중도 등을 나타내는 표시가 돼 있었다. 대략 50여 명이 범친박으로, 그 중에서도 30명이 핵심 친박으로 분류됐다. 또 내년 20대 총선에서의 공천 및 당선 가능성 여부도 언급돼 있었다. 이를 직접 받아 봤다는 한 친박계 의원은 “시중에 도는 정보지 수준은 아니었다. 의원 개개인 현황을 정확히 짚어냈다. 누군가 여권 사정에 정통한 인사가 만든 것으로 판단했다”고 귀띔했다.
정치권 관심 역시 해당 파일의 출처로 쏠렸다. 내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 간 기싸움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세력이 어떤 목적을 갖고 만들었을 것이란 관측 때문이었다. 비박계가 만들었다면 ‘친박 학살용’이란 오해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친박 쪽이라면 박 대통령 친위대 구축 또는 비박계와의 일전을 대비한 기초 작업 정도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찌됐건 의원들을 포함한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파일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불똥이 엉뚱하게도 청와대로 튀었다. 정치권 일각에서 파일의 진원지로 청와대를 지목했던 것이다. 몇몇 여권 핵심부 인사들이 함께 파일을 생산했다는 말도 뒤를 이었다. 이에 대해 앞서의 친박 의원은 “청와대가 유승민 전 원내대표 파동 당시 새누리당 의원 개개인에 대한 성분을 파악해 리스트로 만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그 내용과 상당히 흡사해 청와대가 출처라는 소문이 도는 것 같다. 또 실제로 리스트 일부가 새어나왔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출처설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여권 내에선 파일이 친박 진영에서 만들었을 것이란 데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했던 여권 인사들 역시 대부분 ‘친박’을 가리켰다. 새누리당 비박계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에게 내년 총선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퇴임 후 자신을 보호해 줄 국회 내 우군을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이라면서 “청와대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반드시 공천을 줘야 할 친박 명단을 추렸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유승민 사태 이후 당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높이기 위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에선 파일이 흘러나온 시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현재 새누리당 내부는 김 대표가 제안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로 뒤숭숭한 모습이다. 김 대표가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오픈프라이머리가 실현될 경우 청와대발 전략공천은 불가능해진다. 친박 핵심들이 오픈프라이머리에 부정적 입장을 내비치는 까닭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의 성향을 분석한 파일들이 나온 것을 놓고 정치적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즉, 친박 측이 김무성 대표에게 박 대통령 의중이 담긴 모종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고의적으로 파일을 흘렸다는 얘기다. 내년 총선 룰 전쟁에 앞선 일종의 ‘간보기’인 셈이다.
물론 표면적으론 당·청 관계에 별다른 이상징후가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여권 인사들 중에선 정권 초 ‘허니문’이 다시 찾아왔다는 얘기까지 한다. 친박계가 그 예로 드는 것이 바로 ‘식사 정치’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 파동 이후 7월 16일 박 대통령과 만난 새누리당 지도부는 당과의 소통을 강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박 대통령이 임기 초반 의원들과 잠깐 했던 식사 정치의 부활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 역시 “휴가 후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의원들을 그룹으로 나눠 오찬을 가질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는 “국정 파트너인 당과 청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이라면서 “계파를 가리지 않고 의원들로부터 최대한 많은 의견을 들어 국정 운영에 반영하기 위한 취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작 새누리당 내에선 식사 정치에 대해 부정적 기류가 포착되고 있다. 그동안 당이 청와대와의 소통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것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솔직히 지금은 휴전 상태 아니냐. 더군다나 청와대와 당을 이끄는 박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가 각각 휴가와 미국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다. 수장이 없으니 일시적으로 조용한 것일 뿐”이라면서 “당·청 관계가 좋아 보이는 것은 착시현상이지 수면 아래에선 지금 엄청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로 밥을 먹으러 가고 싶겠느냐”고 주장했다.
비박계 의원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사석에서 만난 한 의원은 영화 <신세계>에서 나온 대사를 인용하며 “거~목에 밥알이 제대로 넘어가겠습니까”라고도 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과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비박계의 또 다른 의원은 “과거 의원 시절 때도 박 대통령을 만나면 괜히 주눅이 들고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박 대통령은 적의 수장 아니냐”면서 “당과 소통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이런 민감한 시기에 박 대통령을 만난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비박계 일각에서는 박 대통령의 이런 식사정치를 지켜보면서 조선시대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 책사였던 한명회가 만들었다는 살생부를 떠올리기도 한다. 한명회 살생부에 오른 자들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청와대가 진행한 것으로 알려진 의원들 성향 분석에 이은 박 대통령과의 식사가 제2의 유승민을 골라내기 위한 노림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비박계 의원은 “단순히 밥 먹겠다고 부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충성서약을 받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뭐 면접이라도 보는 것인지 그 의도에 의문부호를 다는 의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박 대통령이 초청한 식사 자리에 가지 않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