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에 대해 정치권과 사정기관이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처벌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돌고 있다. 서울 소공동 롯데 면세점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지난 3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기 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사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롯데그룹은 사정설에 시달렸다. 롯데는 지난 이명박(MB) 정부 시절 여러 가지 특혜를 받은 기업 중 하나로 지목됐다.
정·재계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롯데의 제2 롯데월드 건축 허가, 부산 롯데타운 신축 허가, 맥주시장 진출 등이 MB 정부 시절 롯데가 취한 특별한 혜택이었다고 지적해왔다. 특히 제2 롯데월드 건축 문제는 군 시설인 성남공항 활주로를 변경해가면서까지 허가해준 터다. 롯데와 관련된 특혜 논란 중심에는 늘 제2 롯데월드가 있었을 정도로 이 문제는 재계뿐 아니라 정치적·사회적으로도 여러 의혹과 추측을 낳았다. 이 같은 이유로 박근혜 정부에서 대기업 사정설이 돌 때마다 롯데는 유력 대상에 포함됐다.
그러나 롯데의 가족 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기 전까지 ‘롯데 사정설’은 그야말로 단순한 ‘설’에 그쳤다. 정치권의 끊임없는 지적과 재계의 관측을 보란 듯이 비켜갔다. 오히려 지난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롯데는 승승장구했다. 올해만 해도 KT렌탈 등을 인수해 신사업 진출과 사업 확장에 대한 열의를 보였으며 그룹의 큰 축인 면세점 사업에서도 번번이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인천공항 면세점 입찰에서는 라이벌 호텔신라 등을 압도하며 유리한 위치를 전부 장악하다시피 했다. 지난 7월 10일 선정 발표에서 탈락한 서울시내 면세점의 경우 이미 소공동 등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터라 롯데 내에서 큰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롯데에 대한 사정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세청은 박근혜 정부 초기인 지난 2013년 롯데쇼핑과 호텔롯데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 6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지만 사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재계 한 고위 인사는 “롯데는 장부 정리에 철저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며 국세청 세무조사 이후 큰 사건이 터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3월에는 검찰이 롯데쇼핑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알려지기까지 했으나 이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지난해 초에는 롯데홈쇼핑의 비리가 터지면서 신헌 전 롯데홈쇼핑 대표와 전·현직 임원들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들 사건 역시 그룹 전체 일로 번지지 않고 신 전 대표의 개인 비리로 일단락됐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백화점을 비롯해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 편의점, 홈쇼핑 등 유통업계 채널을 모두 갖추고 있는 롯데가 경쟁사들에 비해 갑질 논란에 더 많이 휩싸일 여지가 있다”며 “업계에서는 롯데가 내부 직원들에게도 충분한 대우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신세계나 홈플러스 등 경쟁사들에 비해 롯데의 허점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부터 내내 롯데가 ‘대기업 사정설’에 오르내리면서도 칼날을 피해가자 재계 일부에서는 롯데가 정부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심지어 정부 상대로 로비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흘러나왔다. 롯데와 관련해 ‘정경유착’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할 정도였다. MB 정부 시절 대통령실 춘추관장을 지낸 이종현 상무가 2013년 세븐일레븐 CSR부문 부문장으로 롯데에 영입, 현재 롯데쇼핑 정책본부 커뮤니케이션실 상무로 재직 중인 사실마저 세간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도 했다.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걸쳐 승승장구하던 롯데는 그러나 가족 간 경영권 싸움이라는 내부 문제가 터지면서 사정 대상에 오르게 됐다. 재벌의 비상식적인 소유 구조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들끓자 정부가 가만히 있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최경환 부총리가 롯데를 향해 일침을 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공정위는 지난 5일 “롯데그룹 전체 해외 계열사의 주주 현황, 주식 보유 현황, 임원 현황 등 자료를 이달 20일까지 제출하라고 롯데에 요구했다”며 롯데그룹의 실소유 실태와 계열사 간 연결고리를 조사할 방침인 것을 알렸다. 금감원 역시 일본 롯데홀딩스 등 일본 소재 롯데 계열사가 최대주주로 있는 롯데그룹 4개 계열사, 즉 호텔롯데·롯데물산·롯데알미늄·롯데로지스틱스에 대표자와 재무현황 등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국세청은 이미 지난 7월 초 롯데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대홍기획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롯데의 경영권 싸움이 터지기 전 착수한 터라 경영권 싸움과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대홍기획 세무조사가 그룹 전체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재계 시각이다.
정치권도 롯데를 질타하고 있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적은 지분으로 순환출자를 통해 기업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정의뿐 아니라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국민적·시대적 과제에도 맞지 않다”며 “베일에 싸인 롯데의 지배구조를 낱낱이 살피고 법 위반 부분에 대해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계 일부에서는 이번에도 롯데와 신격호 회장 일가에 법적 잣대를 들이대기는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소유지배구조가 복잡하다고 해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며 “위법 요소가 있었다면 이미 그 전에 나왔을 텐데 새로이 위법사항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처벌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롯데의 지배구조가 다른 대기업에 비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며 “이제 와서 새삼 복잡한 지배구조를 놓고 법적으로 몰아세우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롯데에 대해 정치권과 사정기관이 겉으로는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처벌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최 부총리는 관계기관에 롯데에 대한 조사 지시를 암시하면서도 “롯데그룹이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이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강제적 법적 조치보다 롯데에 대한 심판을 ‘시장의 판단’에 맡긴 셈이다. 최 부총리는 또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도록 하는 법 개정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 역시 “기존 순환출자까지 금지하는 것은 투자 위축, 경영권 방어의 어려움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에서 롯데의 복잡한 지배구조에 대한 법적 조치는 취하지 않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최 부총리가 언급한 ‘시장의 심판’은 벌써 진행되고 있다. 지난 4일 금융소비자원이 롯데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한 데 이어 지난 5일에는 소상공인연합회가 롯데마트·롯데슈퍼 불매운동과 소상공인업소 롯데카드 거부 운동을 함께 벌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비도덕적 경영권 싸움과 함께 롯데그룹 국적 논란마저 불거진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여론이 악화하면서 오는 12월 특허가 만료되는 롯데면세점 서울 소공점과 잠실월드타워점의 사업 연장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들을 잃을 경우 ‘세계 면세업계 3위’라는 롯데의 면세사업 위상이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
자금조달에도 문제가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기업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고 사정기관들의 조사로 2013년부터 준비한 롯데정보통신 기업공개(IPO)가 중단되는 것은 물론 기업공개가 예상됐던 코리아세븐 등 몇몇 계열사들의 상장도 당분간 힘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회사채 발행 조건에서도 이전보다 꽤 불리할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사 채권담당 연구원은 “비록 회사가 건실해도 오너와 관련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자금 조달이 쉽지 않으면 롯데가 계획하고 있는 인수·합병(M&A)과 사업 확장이 차질이 빚어진다.
정부가 법적 조치에 난색을 표하는 동안 시장에서는 이미 롯데에 대한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