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석조물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산한촌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이 기념탑만이 이곳이 신한촌 터였음을 증명한다. 왼쪽은 기념탑을 관리하는 고려인 리바체 슬라브 씨, 오른쪽은 현지에서 취재진을 도운 고려인 신 발료자 씨.
<일요신문>은 8월 2일,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 도착했다. 첫날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더니, 늦은 오후부터는 이내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곳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해선 익히 듣고 왔지만 막상 부딪혀보니 일정이 암담하게 다가왔다. 이러한 날씨는 후에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계속됐다.
공항에는 현지 고려인문화센터가 소개한 한국인 최민우 씨(42)가 나와 있었다. 최 씨는 10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전문 가이드로 취재진이 우수리스크로 넘어가기 전, 절반의 일정을 함께했다. 또한 현지의 정확한 해설을 돕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에는 고려인 2세 신 발료자 씨(62)가 동행했다.
취재진은 첫날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략적인 사전 답사에 나섰다. 61만여 명의 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는 미항도시다. 현지에서 만난 이석배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로피안 러시아’를 상징한다면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안 러시아’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도시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동·서양의 미가 묘하게 혼재돼 있었다. 오랜 도시의 역사를 방증하듯,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은 과거의 것 거의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현지 교민에 따르면, 러시아에선 재건축 자체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옛 건물 하나하나가 잘 보존되며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 역시 순수 슬라브인들과 함께 동양의 냄새가 물씬 나는 다양한 혈족들이 길을 거닐었다. 물론 이중에는 고려인들도 있었다.
첫날 취재진이 잠시 들른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은 이곳이 왜 미항도시인가를 실감케 했다. 짙푸른 태평양을 앞에 두고 잘 정비된 공원이 길게 뻗어 있었다. 이날은 특히 지역 해군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서 안중근, 최재형, 장지연 같은 항일지사들이 많은 고민을 되뇌지 않았을까.
도착 다음날인 3일 <일요신문>은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발자취를 더듬어갔다. 그 첫 번째 장소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에 위치한 ‘신한촌’ 터. 신한촌은 1863년 한민족이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번성했던 한인 거주지다. 1911년부터 조성된 신한촌은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등 당시 내로라하는 독립단체들이 한데 모여 있던 곳이다. 한 마디로 한인들의 집단 이주촌이자 항일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현재 신한촌 터는 평범한 주택가로 변해있었다. 신한촌 주변엔 야트막한 상점들과 더불어 연립주택이 길을 사이에 두고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예전 신한촌의 터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곤 한 가운데 자리한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탑’뿐이었다. 취재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념탑은 지난 1999년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한국의 한 사업가의 지원으로 건립했다. 탑은 커다랗고 기다란 석조물 세 개로 이뤄져 있었다. 취재진은 현장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16년째 기념탑을 관리하고 있다는 고려인 리바체 슬라브 씨(61)를 만날 수 있었다. 지역 고려인 단체 간부 출신인 슬라브 씨는 몇 년 전 뇌졸중을 앓은 뒤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여전히 신한촌을 지키고 있었다.
슬라브 씨는 세 개의 석조물이 나름의 상징이 있다고 소개했다. 맨 가운데 석조물은 ‘한국’을, 좌측은 ‘북한’을, 우측은 고려인을 포함한 해외의 한민족을 상징한다고. 슬라브 씨는 “최근 이곳 기념탑과 기념비에 낙서를 하고 도망가는 러시아인들의 횡포 탓에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것을 일일이 지워내느라 고생깨나 했다. 이곳에 좀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슬라브 씨는 더 이상 내색은 안 했지만, 여전히 러시아에 남아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얘기하고 싶은 듯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랜 기간 이곳을 지키고 있는 그의 뜨거운 마음이 그대로 전달됐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의 집터로 현재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신한촌에 있었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의 흔적들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취재진이 신한촌을 탐방하는 도중에 마주친 ‘엘레나’라는 대형마트는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는 이동휘 선생의 집터였다고 한다.
신한촌은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중 가장 번성했던 곳이지, 최초 정착지는 아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현재의 시내 중심지와 근접한 해안가였다. 이른바 ‘개척리’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현재의 명칭은 포그라니치나야 거리.
신한촌 조성보다 훨씬 이전인, 1873년부터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에는 당시 한인 민족학교들은 물론 해조신문사, 대동공보사 등 항일 언론사들이 활동했다. 특히 대동공보사는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직접 운영하던 곳으로, 후에 <일요신문>이 집중 조명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했던 곳이다.
고려인들이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개척리 터에서도 흔적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취재진은 신한촌을 빠져나와 개척리 터를 찾았다. 해안가를 끼고 도심지와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개척리 터 역시 현재는 러시아의 신식 건물들만 줄곧 눈에 띄었다. 옛 흔적들을 찾기는 좀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두 한인촌이 현재는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데에는 일제와 러시아 정부(제정 러시아와 볼셰비키 정부)의 억압이 컸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최초 한인 정착지인 개척리의 경우, 1911년 당시 러시아 정부가 ‘역병 유행’을 이유로 강제로 한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병영을 세웠다고 한다.
최대 한인촌이었던 신한촌은 두 차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후에 자세히 다룰 1920년 일제의 ‘4월 참변’에 의해 한 차례 어려움을 겪은 신한촌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의해 직격탄을 맞았다. 일제의 만행도 만행이지만, 두 번째 고비였던 스탈린의 광풍을 신한촌의 고려인들은 넘어서지 못했다.
옛 일제 영사관이 위치한 오케얀스카야 거리는 일제가 한민족을 탄압했던 근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곳곳에는 그 아픔의 역사적 흔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오케얀스카야 거리에는 고려인들의 앞서 두 가지 아픔을 상징하는 장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오케얀스카야 거리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일제의 옛 영사관 건물이다. 1916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쓰였다고 한다. 이석배 총영사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이 건물은 연해주 정부의 법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웅장한 스텔라가 돋보이는 2층 구조의 옛 일제 영사관 건물은 깨끗했고,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특히 지붕 위에 여전히 장식물로 남아있는 ‘연꽃무늬’의 구조물들은 이곳이 과거 일제의 건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웅장한 일제의 옛 영사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오케얀스캬야 거리 자체가 예전엔 일본인들이 주로 활동했던 장소라고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당시 이곳을 거점삼아 각종 무역과 사업에 매진했다. 당시 한민족을 탄압했던 일제의 근거지 오케얀스카야 거리는 현재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발달되고 화려한 거리였다. 각종 청사들은 물론 고급 레스토랑과 가전제품점 등이 즐비해 옛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케얀스카야 거리 맨 끝자락을 지나 스베틀란스카야 대로가 나오는데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인 ‘혁명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 혁명광장은 소련 시절의 이름이고 지금은 ‘중앙광장’이 정식명칭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광활한 광장 중심에는 예전 소련 정부를 위해 싸운 병사를 상징하는 거대 조각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때마침 내린 폭우 탓에 이 광활한 광장과 깃발을 들고 우뚝 선 조각물들은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1937년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통보를 받고 집결했던 곳이 바로 혁명광장이다. 마침 내린 폭우 탓에 광활한 광장과 거대한 조형물이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이 광장 역시 우리 한민족에겐 크나큰 아픔의 장소로 남아있다. 1937년 몰아친 스탈린 정부의 소수민족 이주정책에 의해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곳곳에 강제 이주 조치를 당한다. 당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 조치를 통보받고 집합했던 곳이 바로 이 혁명광장이었다. 광장을 걷는 내내, 당시 막막했던 고려인들의 안타까움이 발끝에 묻어나는 듯했다.
취재진은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의 마지막인 블라디보스토크역으로 향했다. 앞서 혁명광장이 고려인 강제 이주의 집합소였다면, 블라디보스토크역은 그 시발점이었다. 1912년에 건설된 역사는 현대 건물과 견주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고, 웅장했다. 이곳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시작점으로 유명하다. 역사 맞은편엔 거대한 레닌 동상이 거창하게 취재진을 반겼다.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블라디보스토크역을 통해 우리 고려인이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1863년부터 그저 기근을 피해 살기 위해, 때론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겨우겨우 정착한 제2의 고향 연해주를 다시금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역사는 현지 고려인에게 있어선 크나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때마침 내린 폭우가 마치 당시 우리 조상들의 눈물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일요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좀 더 남쪽의 외곽지역으로 향했다. 크라스키노를 비롯한 연해주 남쪽 지역엔 좀 더 원시적인 옛 고려인들의 정착 역사와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떠난 안중근 의사의 발길이 스며 있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4월 참변과 스탈린 광풍 세간살이 풀 한포기 그대로 남겨두고…17만명 단 24시간 만에 쫓겨나 <일요신문>의 이번 연해주 대장정에는 크게 고려인들의 두 가지 역사적 아픔이 관통한다. 하나는 러일전쟁 이후 연해주로 들이닥친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만행이다. 그 중심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중심으로 행해진 1920년 ‘4월 참변’이 있다. 1929년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역. 고려인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이 역사를 통해 제2의 고향을 등지고 중앙아시아로 향했다. 4월 참변은 비슷한 시기에 중국 동북지역에서 자행된 ‘경신참변’과 비교된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 세력이 득세하자, 일제는 이때부터 연해주에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파병을 시작한다. 이후 일제와 볼셰비키 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조선인이 볼셰비키를 도와 일본인을 위협한다’는 명분을 삼아 보복행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물론 이곳에서 활동했던 독립투사들을 포함해 무수한 조선인 수백 명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4월 참변이다. 이는 고려인 이주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다른 하나인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는 역설적이게도 앞서 4월 참변과는 정반대의 이유로 행해진 소련의 만행이다. ‘극동 지역 조선인이 일제의 첩자 노릇을 한다’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고려인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산 넘어 더 큰 산’이 있었던 셈. 이러한 이유로 당시 연해주에 거주했던 약 17만 명의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단기간에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소련 변방 곳곳으로 내몰렸다. 우수리스크에서 만난 고려인문화센터 김발레리아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연해주로 온 현지인이 집 한 채를 배정 받았다. 그런데 그 집을 들어가서 소름이 쫙 돋았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사람이 살던 곳처럼 세간은 그대로였고, 텃밭은 풀 한 포기 없이 정돈돼 있었다. 알고 보니, 전날 막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 강제이주 명령을 받은 고려인들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정들었던 땅을 떠났다.” 당시 스탈린 정부가 강제이주 명령을 내리며 고려인들에게 준 채비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사실상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집을 떠난 셈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앞으로 <일요신문> 대장정에 중요한 주제로 관통하게 될 것이다. [한] |
러시아 사회의 두 고려인 연해주 고려인-함경도 출신 개척자들 / 사할린 고려인-영호남 출신 징용자들 러시아에는 크게 두 종류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취재진은 현지에서 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의 고려인이란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고려인’이다. 두 고려인은 이주 시점과 이유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각자 독특한 문화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사할린 고려인’은 1930~1940년대, 일제의 강제징용에 의해 사할린으로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시 사할린의 절반은 일제의 땅이었다. 당시 징용됐던 조선인 대부분은 인구가 풍부했던 영·호남 사람들이었다. 북한 출신으로 연해주를 통해 자의적으로 사할린으로 넘어간 고려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비옥한 연해주 땅을 떠나 척박한 사할린으로 넘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전자인 연해주 고려인이었다. 사할린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의 경우, 본의 아니게 척박한 땅으로 내몰렸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광풍을 빗겨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취재진의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안내를 맡았던 신 발료자 씨는 사할린 출신이다. 능수능란한 한국어 실력에 취재진은 깜짝 놀랐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 말투에선 영남 사투리가 묻어났다. 알고 보니 신 씨의 부친은 경남 마산 출신으로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신 씨의 모친은 당시 갓난쟁이였던 신 씨의 형을 들쳐 업고 남편을 찾고자 마산에서 머나먼 사할린 땅으로 향했단다. 반면 연해주 본토 출신의 고려인들 대부분 한국말을 전혀 못하거나 서투르다. 신한촌에서 만난 슬라브 씨 역시 한국말은 단 한 마디도 못했다. 당시 스탈린 광풍 탓에 상당수가 타지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연해주 고려인은 자신의 터전은 물론 말마저도 잃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 하는 서툰 우리말에서는 함경도 사투리가 묻어났다. 이러한 문화적·역사적 차이 탓에 러시아 안의 두 고려인은 다소 간극이 있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가 빚어낸 비극이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