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DB
‘한 달 용돈은 20만~30만 원. 대체적으로 모자라다고 느끼며, 10명 중 8명이 ‘비상금’ 은닉 경험이 있다.’
<일요신문>이 기혼 남성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다. 이들은 저마다 용돈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내 놨다. 맞벌이 비율이 절반에 육박한 시절임에도 수입 관리는 여전히 여성들의 몫인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결혼 전 한 달에 수백만 원의 신용카드 명세서를 받아본 이들도 결혼만 하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맞벌이든 외벌이든 결혼과 동시에 수입은 ‘내 돈인 듯 내 돈 아닌’ 것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경제관념을 한꺼번에 바꿔야 하는 남성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답답함을 토로할 만한 일이다.
설문에 응답한 50명의 패널 중 교통비와 통신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10만 원 미만의 용돈으로 생활한다는 응답자도 5명이나 됐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이렇게 적게 받아도) 남는다”는 믿지 못할 얘기까지 했다. 응답자 20명은 21만~30만 원을 받는다고 응답했다. 10만~20만 원을 받는다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직장인 이 아무개 씨(32)는 “사실 20만 원 정도의 용돈으로는 후배들 만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네 명이 모여 술 한 잔 하면 10만 원 정도가 깨진다. 만날 눈치 보며 계산대 앞에서 구두끈 묶을 수도 없지 않느냐”며 현재 ‘용돈 시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심리적 빈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돈의 절대적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응답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같은 용돈을 받아도 주변 지역 물가가 높고 구내식당도 없다면 ‘용돈 빈곤족’에 해당한다. 반대로 밥값과 커피 값까지 제공하는 회사를 다니는 이들은, 같은 용돈을 받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보다 더 ‘심리적 빈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건 흡연과 음주 여부. ‘용돈 풍요족’의 대부분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니 돈 쓸 일이 많지 않다”고 답했다. 주부 김 아무개 씨(29)는 “담배 끊으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용돈을 올려주지 않고 있다. 담배만 끊으면 용돈도 남고 모든 게 해결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싶다”며 고개를 저었다.
‘용돈 빈곤족’을 괴롭히는 건 얇은 주머니 사정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주변 동료들의 시선은 더 따갑다. 설문 응답자 중 한 명은 “수입은 내가 관리한다”며 “왜 내가 돈 벌었는데 용돈을 받아 쓰냐. 주변에 한 달 5만 원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보면 안쓰럽다”는 의견을 표했다. 또 다른 남성 역시 “부부 수입은 내가 관리한다. 애도 아니고 내 경제활동을 아내한테 통제받는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용돈 받는 남편 중 비상금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심지어 ‘지금 받는 용돈이 충분하다’고 응답한 이들마저 ‘비상금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가장 흔한 비상금 관리 방법은 회사에서 나오는 ‘특별 수입’을 따로 빼돌리는 방식이다. 직장인 신 아무개 씨(41)는 “아내는 인터넷뱅킹도 일체 할 줄 몰라 ‘비자금 조성’이 쉽다. 내 통장으로 일단 월급을 받고 성과급이나 야근, 특근 수당을 제외하고 아내 통장으로 이체한다. 물론 송금자를 회사 이름으로 바꾸는 건 필수다”고 자신의 팁을 공개했다.
이렇게 비교적 손쉽게 비자금을 모으는 이들이 있는 반면, 더 눈물겨운 ‘비상금 쟁취전’을 벌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송 아무개 씨(39)는 “아이 과자 사주고 오라고 돈을 받으면 잔돈은 꼭 챙긴다. 빨래통을 뒤지기도 한다. 비참해지기도 하지만 가끔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횡재한 기분이다”라며 “목돈이 필요할 땐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바꾸기도 한다. 보조금을 따로 챙기면 한 번에 10만~20만 원도 받을 수 있다”고 자신만의 요령을 전했다. 또 다른 남성은 “자동차 동호회에서 차량 블랙박스를 달아주고 돈을 받는 ‘부업’을 한다. 주변에는 컴퓨터를 손봐주는 부업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갖고 있는 카메라, 노트북 등의 물품을 중고로 팔아 비상금을 마련한다는 응답도 있었다.
적은 용돈을 받는 남편들이 가장 진땀을 빼는 시기는 바로 기념일이다. 가족의 경조사는 아내와 협의를 통해 챙기지만,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은 셈법이 복잡해진다. 남성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아내 생일에도 아내한테 돈 받아서 선물을 사야 하나’라고 묻는 예비 신랑과 새신랑들의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 이에 대해 ‘관록 있는’ 남편들은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한 남성은 “일단 아내 카드 긁어서 선물을 준비한다. 선물 받을 땐 아주 좋아하지만, 카드 고지서가 나오는 날에는 혼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성은 “기념일 때 추가로 용돈 안 주면 선물도 없다고 협박한다. 그러다보니 안 주고 안 받게 된다”고 결혼생활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했다.
용돈에 관해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할 말이 많았다. ‘용돈과 관련해 배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는 질문에도 다양한 답이 나왔다. 한 응답자는 “용돈 안 늘려줘도 좋다. 제발 쓸 데 없는 데 돈 좀 쓰지 말라”는 의견을 적었고, 또 다른 패널 역시 “용돈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자식이 어려서 어쩔 수 없이 참고 산다”며 ‘속풀이’를 하기도 했다. 반면 용돈이 충분하다고 응답한 이들 중에는 “월급이 적어 늘 미안하다”, “항상 감사할 뿐이다. 여보 사랑해”라고 쓴 남편도 있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비상금 은닉’의 진화 결혼 전에 미리 ‘딴 주머니’ 찬다 남편들과 아내들이 영악해지고 있다. 과거 비상금은 결혼생활 도중에 모으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요즘 신혼부부들은 다르다. 결혼 준비와 동시에 비상금을 챙길 궁리를 한다. 실제 남성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와 여성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양쪽 모두에서 ‘혼전 비상금 계획’에 대한 문의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모두 결혼자금에 쏟아 붓자니 아깝고, 결혼 후의 빤한 경제사정이 두려워 미리 ‘딴 주머니’를 찰 계획을 하는 것이다. 한 기혼 여성은 “혼수는 모두 부모님께서 해주셔서 결혼 전 모은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갖고 있다. 신랑은 전혀 모른다”고 귀띔했다. 남편들은 비상금을 숨기는 장소로 벨트 안이나 형광등 스위치 안쪽을 곧잘 이용한다. 게임 아이템으로 재테크를 하는 남성도 많다. 요즘은 아이템 거래를 대행해주는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게임 아이템은 현물을 직접 거래하는 게 아니라 사기당할 위험이 높다. 아이템 거래 서비스 사이트는 중개를 해줘 사기당할 위험이 적고, 구매자와 판매자 매칭이 쉬워 요즘 유부남들의 비상금 관리 통로로 떠오르고 있다. 비상금 통장으로 주목받았던 ‘스텔스 통장’도 여전히 인기다. 본인이 은행을 방문하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 계좌로, 모바일·인터넷 뱅킹도 아예 불가능하다. 부부가 공인인증서까지 공유하고 있는 경우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스텔스 통장이 아니더라도, 주거래 은행이 아닌 곳에 배우자 몰래 계좌를 개설해 관리하는 이들도 많다. 계좌에 연결된 카드는 회사에 두거나 들고 다니지 않아 ‘물증’을 없애는 게 포인트다. 비상금 만들기의 가장 ‘하수’는 현금으로 보관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계좌를 트기엔 걸릴까봐 두려워 현금을 아내나 남편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는 경우다. 남성들이 생각하는 비상금 보관을 위한 ‘안전한 곳 베스트 3’는 컴퓨터 본체 안쪽, 형광등 스위치 안쪽, 변기뚜껑 안이다. 보통 전기설비나 변기가 고장 났을 때 손을 보는 건 남편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안심할 수 없다. 한 남성은 “컴퓨터 안쪽에 쌓인 먼지가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는 방송이 나왔다. 아내가 그 방송을 보고 청소하려고 본체를 뜯는 바람에 그간 모아온 비상금 150만 원이 들통 났다”고 커뮤니티 게시판에 하소연을 했다. 이밖에 돈을 숨길 수 있는 벨트 이용하기, 볼펜심 빼고 돈 넣어두기 등의 방법이 공유되고 있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의 김미영 소장은 “기본적으로 누가 벌든 수입은 부부공동소유라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큰돈만 아니라면 약간의 비상금은 서로 눈감아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어느 한 쪽이 경제권을 통제하는 데 대한 반발 심리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조언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