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靑島) 쪽은 아예 보이스 피싱 마을투성이다.”
지난 13일, <일요신문>과 만난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관계자는 이같이 말했다. 경찰은 “칭다오 호프집에 가면 이 친구는 금융 보이스, 저 친구는 대포 보이스라고 자기들끼리 부른다”며 “보이스 피싱이 일상이다.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중국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칭다오부터 대륙 아래쪽 광저우(廣州)까지, 보이스 피싱 콜센터가 수없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 경찰은 “조선족 ‘말빨’이 안 먹히면서 한국인들이 중국으로 많이 넘어갔다”고 보탰다.
최근 경찰은 중국 공안당국과의 공조 수사로 광저우와 칭다오에서 활동하던 보이스 피싱 2개 조직 41명을 검거했다. 조직원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지난 2012년 10월부터 지난 6월까지 전화를 걸어 대출과 예금보호를 해주겠다고 속였다. 피해액은 총 21억 4000만 원, 피해자는 무려 423명에 달했다. 경찰 수사를 토대로 구성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광저우 총책 이 아무개 씨(31)는 서울 송파구 인근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했다. 이 씨는 업소 사정이 곤란해지자 보이스 피싱 범죄를 기획했다. 그는 한국 경찰의 감시를 피할 수 있고 한국인들이 많아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는 중국 광저우 지역을 ‘본부’로 선택했다.
이 씨는 먼저 백 사장이라 불리는 자금책과 접촉했다. 현지 사정에 밝아 보이스 피싱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주고 자금줄 역할을 하는 백 사장은 광저우 현지에서 자신의 명의로 아파트 3채를 빌렸다. 한국인인 이 씨 명의로는 부동산 임차가 불가능했다. 인터넷 전화와 휴대전화도 설치해줬다. 물론 비용은 백 사장이 지불했다. 다만, 이 씨가 꾸린 조직이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면 백 사장이 수익금의 20~30%를 가져간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일종의 투자였다.
‘콜센터’가 차려지자 이 씨는 “한 달에 기본 300만 원 플러스알파를 챙겨 줄 테니까 와서 전화만 하면 된다”며 “잘 하면 월 500만 원 정도 벌 수 있다. 한 번 해보자”고 자신의 업소 웨이터들을 유혹했다. 영화 외주업체에서 일하던 직장인, 전과 하나 없는 일반인들도 범죄에 가담했다. 중국 관광비자의 유효기간은 3개월, 이 씨의 말대로라면 못해도 1500만 원을 벌 수 있었다. 악마의 속삭임은 달콤했던 걸까. 이들은 결국 이 씨를 따라 바다를 건넜다.
한·중 경찰이 공조 수사를 통해 중국 현지에서 보이스피싱 2개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총책을 검거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2년 10월부터 지난 6월까지 중국 광저우와 칭다오에서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운영하며 국내 불특정 다수 총 423명으로부터 21억 4000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총책 이 씨를 중심으로 광저우 조직원들은 팀장과 TM(전화상담원), 인출관리 3개의 팀으로 구성돼 현장에 투입됐다. 한국에 사기 전화를 거는 콜팀, 한국에서 현금을 인출해 중국으로 송금하는 인출팀,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을 중국 계좌로 송금 받는 인출관리책으로 구성됐다. 콜팀은 사기액의 10∼30%, 인출팀은 6∼10%, 팀장급은 월급 500만 원에 사기액의 10%를 성과급으로 받았다. 백 사장과 이 씨가 나머지를 가졌다.
콜팀 조직원들은 ‘한국인’이라는 장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이들은 검사를 사칭해 피해자들을 협박하는 방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수법은 더 과감하고 교묘했다. 개인 신용정보가 담긴 DB를 토대로 ‘맞춤형’ 보이스 피싱 전략을 세웠다. 87개의 사기성 시나리오를 짰다.
특히 ‘대환대출’ 빙자 시나리오 전략이 효과적이었다. 전화상담원 역할을 맡은 A 씨는 “XX저축은행입니다. 1000만 원에 5%짜리 빚 ○○은행에 있죠? 3%짜리로 대환대출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피해자 B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대출정보를 정확히 아는 데다, XX저축은행 전화번호로 걸려왔기 때문에 B 씨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A 씨는 대환대출을 위해선 은행 담당자와 통화해야 한다며 C 씨를 연결했다.
C 씨가 붙잡을수록 B 씨는 XX저축은행의 대환대출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XX저축은행 대출조건이 A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C 씨가 못이기는 척 포기하자 A 씨는 다시 B 씨에게 전화를 걸어 “대환대출을 위해 기존의 대출금을 일시 상환해야 된다”고 설득했다. B 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부동산 매물 매수 빙자’ 시나리오는 토지 매도인이 표적이었다. 조직원들은 생활정보지의 토지 매도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현금으로 토지를 구매할 매수자가 나타났다”고 속였다. 이들은 매수자가 토지에 대한 ‘시세평가서’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씨 일당은 “우리가 시세평가를 높게 해줄 거다. 그러니 수수료를 달라”고 먼저 요구해 중간에서 돈을 가로챘다. 시세평가로 토지를 높은 가격에 팔아주겠다며 매도인들을 욕망을 자극해 수수료를 계속 높여나간 것. 수수료는 계속 늘어났다. 경찰은 “한국인들이 많이 가담하면서 협박성 보이스 피싱보다 사기성 시나리오들이 많아졌다”며 “국내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정부 정책의 흐름마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부에서 최신 ‘저리’ 금융상품이 내놓으면 뉴스를 인용해 피해자들을 속였다. 국세환급금, 유가환급금을 찾아가라는 뉴스가 나오면 이에 맞는 시나리오도 준비했다. 뉴스가 방송된 다음날, “어제 뉴스 보셨죠?”라며 “환급 받으실 게 100만 원이다. 환급을 위해 보증금 50만 원을 보내셔야 한다”고 전화를 걸었다. 1000만 원을 대출해 주는 대신 300만 원의 잔고증명이 필요하다며 돈을 뜯어내는 ‘잔고증명’ 시나리오부터, 휴대폰을 신규로 개통한 뒤 유심 칩을 제거하고 포장 상태로 보내주면 노트북 매입이 가능하다고 속이는 ‘노트북 판매’ 시나리오까지, 다양한 수법을 활용했다.
이렇듯 잘 돌아가던 광저우 콜센터 조직은 지난해 초부터 수익 배분 문제로 조직원들 간에 다툼이 생겼다. 수십억 원 단위의 목돈이 들어와도 정작 개개인별로 손에 쥐는 돈이 적었던 것. 결국 지난해 4월경 조직원 이 아무개 씨(38)는 칭다오로 이동해 보이스 피싱 콜센터를 ‘창업’했다. 중국인 전주 김 과장을 만나 앞서의 이 씨와 같은 방법으로 아파트를 임차해 범행을 시작했다.
한편 지난 3월 서울지방경찰청 지능수사대는 보이스 피싱 조직원 6명을 체포했다. 그 중 칭다오 조직원 D 씨가 있었다. 경찰은 중국 내 한국인 조직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D 씨를 중국으로 보냈다. D 씨는 청도와 광저우의 조직원들의 범죄 수법을 감시해 경찰에 수시로 보고했다. 경찰은 수개월 동안 D 씨와 범죄정보를 공유했다. D 씨가 목숨을 걸고 경찰의 정보원 역할을 한 것. 이런 노력 끝에 지난 6월 서울지방경찰청 지능수사대는 중국 칭다오형사지대와 공조 수사를 벌여 칭다오 콜센터를 급습해 조직원들을 체포했다. 곧바로 광저우 총책인 이 씨 일당도 붙잡아 일망타진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
해외에 ‘콜센터’ 차리는 까닭 3개월 단위 ‘먹튀’ 반복 ‘나 잡아 봐라~’ 한국인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칭다오 공항에서 검거된 모습과 범행에 사용된 저축은행 직원 위조명함. KBS 보도 화면 캡처. 역할도 뒤바뀌는 추세다. 총책이나 팀장을 담당했던 조선족들이 이젠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전달받아 총책으로 넘기는 ‘인출책’만 담당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 과거 중국인이나 조선족이 운영하는 콜센터의 전화상담원으로 들어간 한국인들이 범죄수법을 배워 중국 본토에서 직접 콜센터를 차리는 경우가 증가했다. 실제로 앞서 광저우 조직의 콜팀과 인출팀장은 전부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인 보이스 피싱 조직원들의 치밀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 공안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콜센터를 계속 옮겨 다니기도 한다. 중국 관광비자의 유효기간이 3개월이기 때문에 석 달에 한 번씩 사무실을 이전했다. 3개월마다 중국에 가서 크게 ‘한탕’을 하고 국내로 입국, 그리고 다시 출국해 다른 곳에 사무실을 다시 꾸리는 수법이다. 공안들이 피의자들의 신원과 주소를 특정해 현장을 덮쳐도 조직원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태국 푸켓,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를 공략하는 한국인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최근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태국과 베트남 등에 콜센터를 차려 놓고 유명 캐피털 업체를 사칭한 2개 보이스 피싱 조직 41명을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워낙 불상지라, 피의자들조차 주소를 기억하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면서 “기본적으로 먹고 자고 하는 데 드는 물가가 싸니까…, 국내에서 조직원들을 포섭해 해외로 넘어가는 거다”고 전했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