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씨가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9세에 집안에서 쫓겨나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상속전쟁을 벌인 그의 인생역정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제공=우먼센스
193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은 어린 시절 대구 수창초등학교와 당시 6년제였던 경북중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입학은 서울(수송초등학교)에서 했으나 이내 대구로 내려갔다. 도쿄농업대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시간주립대 대학원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일본과 미국 유학생활을 거칠 정도로 ‘황태자’에 어울리는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본 유학 막바지인 1956년 12월 1일 손복남 고문과 결혼했다. 11월 1일 결혼 이야기가 나온 후 불과 한 달 만에 올린 혼사지만 이 전 회장은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빠른 속도로 성사된 결혼이었지만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결혼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부인 손복남 고문에 대한 깊은 애정의 표현이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이 전 회장은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결혼식을 치른 지 두 달 만인 1957년 2월이다. 이때 미국 유학길에 동행한 사람이 매제 구자학 아워홈 회장이다. 구 회장은 이 전 회장의 첫째 여동생인 이숙희 씨의 남편이다. 이들의 결혼으로 삼성의 이씨가와 LG의 구씨가는 사돈을 맺었던 것.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이맹희 전 회장과 구자학 회장이 미국 유학생활을 함께했다는 점.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두 달 후에는 손복남 고문과 이숙희 씨가 함께 남편 곁으로 갔다. 외롭고 험난한 타국생활을 함께 한 오누이 부부의 정이 남다를 것이라는 점은 짐작 가능하다. 이들의 끈끈한 정은 이후 55년이 지난 2012년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상속 소송을 함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전 회장과 손 고문은 미국 유학 시절 장녀 이미경 부회장과 장남 이재현 회장을 얻었다.
1987년 11월 23일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례식에 참석한 차남 이창희·삼남 이건희·장남 이맹희 형제(왼쪽부터). 일요신문DB
한국으로 돌아와 이 전 회장이 처음 직장생활을 한 것은 1960년 한일은행에 입행하면서다. 그룹 경영 참여보다 은행원을 먼저 시작한 것은 아버지 이맹희 전 회장이나 장남 이재현 회장이나 같다. 경복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이재현 회장 역시 삼성그룹 입사를 거부하고 씨티은행에 입행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입행한 지 2년 만인 1962년 안국화재로 직장을 옮겼는데, 당시 이맹희 전 회장을 경계한 이병철 회장의 비서진이 이 전 회장을 모함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맹희 전 회장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병철 회장의 일부 비서진이 이맹희 전 회장의 그룹 경영 참여를 차단하기 위해 모함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일은행에 입행한 이 전 회장이 행장에게 대들고 대부 알선을 해주면서 ‘커미션’을 받는다는 등 근무태도가 불성실하다고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화가 난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 전 회장을 한일은행에서 나오게 해 안국화재에 들여보냈다는 것.
이맹희 전 회장은 이후 안국화재-미풍산업-삼성물산-중앙일보-삼성문화재단-삼성전자 등 삼성그룹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창업주의 장남으로서 그룹 후계자 과정을 착실히 밟아나간 것. 그러나 1967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이 전 회장은 하루아침에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가 구속됐다.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 후 그룹 경영에서 물러났다. 여기까지는 이맹희 전 회장이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문제는 1969년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려던 때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는 이병철 회장이 직접 개입됐다는 내용의 투서가 전달된 것. 이른바 ‘청와대 투서사건’이다. 이병철 회장은 이 투서를 그룹 경영권을 노린 이맹희 전 회장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장남을 내쳤다. 이에 대해 이맹희 전 회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 일가에서는 오히려 이맹희 전 회장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이맹희 전 회장은 1970년 5월 제일제당 대표이사를 끝으로 삼성에서 내몰렸다.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이 된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황태자 생활을 했던 이맹희 전 회장은 만 39세에 집안에서 쫓겨난 후 허전한 삶을 살았다. 훗날 제일제당이 삼성에서 계열분리해 나오고 CJ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이맹희 전 회장은 경영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의 말년은 더 안타까웠다. 2012년 2월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7000억 원대의 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여동생 이숙희 씨가 이 소송에 힘을 보탰다. 이 상속 소송으로 이맹희 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형제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건희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형 이맹희 전 회장을 ‘양반’이라 칭하며 격하게 반응했을 정도였다. 삼성과 CJ의 그룹 간에도 긴장 상태가 불거졌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1·2심에서 모두 패했으며 2014년 2월 상고를 포기했다.
상속소송을 벌이던 중인 2012년 12월 이맹희 전 회장은 폐암 진단을 받고 폐의 3분의 1을 잘라냈다. 그러나 곧 암이 다른 부위로 전이돼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고 투병생활을 했다. 지난해에는 암세포가 혈액을 통해 림프절로 전이돼 중국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었다. 노년에 타국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는 가족이 없었다.
장남 이재현 회장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더욱이 이재현 회장 역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다. 장녀 이미경 부회장도 미국을 오가며 신병치료를 하고 있다. 부인 손복남 고문은 국내에 머물며 위기에 처해 있는 CJ그룹을 챙기고 있다.
결국 지난 14일 이맹희 전 회장은 타지에서 가족들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눈을 감았다. 태어나는 순간에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황태자였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에는 지독한 병마와 싸우는 외로운 노인이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