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장남 신동주 전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일본으로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는 신격호 총괄회장 모습. 연합뉴스
실제 롯데는 불투명한 지배구조만큼이나 신 총괄회장에 대한 정보나 소식이 세상 밖으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때문에 신 총괄회장과 관련된 각종 루머와 억측 등이 ‘음지’에서 나돌기도 했다. <일요신문>은 신 총괄회장의 기록이 담긴 서적들과 과거 한일 양국에서 이뤄진 언론 인터뷰를 바탕으로 ‘CEO 신격호’를 만나봤다.
#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 뱅크
“롯데를 선택한 것은 내 일생 최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는 생각에 변함없다.”
학창시절 작가를 꿈꾸던 신 총괄회장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큰 감명을 받아 사명에도 활용했다. 베르테르가 짝사랑한 여주인공 샤르로테 부프(Charlotte Buff)의 애칭 ‘로테’의 일본식 발음을 따라 ‘롯데(Lotte)’로 지은 것.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신 총괄회장의 바람이 담긴 사명이다. 그는 “롯데라는 이름이 떠올랐을 때 충격과 희열을 느꼈다”고 회고할 정도로 사명에 애착을 보였다.
출발부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보였던 신 총괄회장은 독특하고 과감한 광고로도 주목을 받으며 이를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그중 ‘미스롯데 선발대회’는 가장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손꼽힌다. 컬러텔레비전 전성시대를 미리 내다본 신 총괄회장은 “브라운관을 통해 아름다운 미인들을 뽑는 대회를 열자. 미인이 주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면 롯데와 우리 상품이 연상되어 좋은 홍보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며 미인 마케팅을 도입했다.
신 총괄회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껌을 만드는 제과회사가 미인대회를 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여기에 화려한 외모를 뽐내는 수상자들이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고 롯데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홍보효과를 누렸다.
아직도 일본에서 회자되는 마케팅이 있었으니 1961년 신 총괄회장의 아이디어로 실시했던 ‘상금 1000만 엔 경품 이벤트’다. 껌을 사면 추첨권을 부여해 당첨자에게 상금과 함께 부상을 증정하는 행사였다. 당시 일본의 가계 월 평균 수입이 2만 5000엔에 불과했으니 1000만 엔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거액의 상금을 앞세워 롯데는 전국 언론, TV, 라디오, 교통수단, 소매점 등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홍보를 실시했고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타사 고객을 부당하게 빼앗을 위험이 있다며 독점금지법에 저촉되는지 여부에 대해 조사를 실시할 정도였다. 그런데 공정위의 개입이 롯데에게는 오히려 득이 됐다. ‘롯데’라는 브랜드 이름과 ‘제일 좋은 껌’이라는 이미지를 굳히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무려 760만이 참여하며 이벤트는 마무리됐고 롯데는 이를 기반으로 매출 50억 돌파, 90억 돌파 행진을 이어나가며 경쟁사를 앞질렀다. 이듬해 상금을 내거는 이벤트가 금지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남긴 행사였다.
# ‘신격호 빨강’ 찾고 만족
서울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호텔롯데는 신 총괄회장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호텔롯데를 짓기 위해 신 총괄회장은 전 세계 유명 호텔 대부분을 답사했다고 한다. 유난히 공사기간이 길었던 까닭도 신 총괄회장이 새로운 호텔을 볼 때마다 돈과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설계도면을 바꿨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카펫과 벽지 색깔, 정원수까지 신 총괄회장이 직접 챙겼는데 이 때문에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호텔 객실의 벽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갈아 붙이기 일쑤였던 것. 하지만 신 총괄회장의 ‘유난’ 덕분에 호텔롯데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다.
1990년 3월 24일 롯데월드 매직아일랜드 개장식 때의 신격호 회장. 사진출처=<신격호의 비밀>
세계 랭킹 10위에 오른 호텔롯데의 프런트. 사진출처=<신격호의 비밀>
과거 잠실 롯데월드를 건축할 때도 건물 외관 색깔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신 총괄회장은 조선을 상징하는 빨간색을 넣어줄 것을 요청했는데 수많은 빨간색 중 그가 정확히 원하는 색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수정 끝에 ‘신격호의 빨강’을 찾아 롯데월드 외관에 사용하고는 상당한 만족감을 표현했다고 한다.
금기시하던 건물의 누드 디자인을 적용한 소공동 본점 영플라자 외관 역시 신 총괄회장의 작품이다. 젊은 고객들이 주로 방문하는 장소이니 개방성을 강조한 유리벽 외관을 설치할 것을 주문했는데 임직원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리벽 외관은 이후 롯데 영플라자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았다.
# 유별난 현장중시
한때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 가며 경영활동을 했던 신 총괄회장. 그가 귀국하는 날이 다가오면 롯데 임직원들은 2~3일 전부터 대청소와 정리정돈을 하느라 분주했다. 매일 계열사 보고를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시에 현장점검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 총괄회장은 남들이 보지 못한 작은 부분까지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 임직원들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수행원을 멀리하고 홀로 고객들과 뒤섞여 영업장을 방문해 문제점을 찾아내는가 하면 야밤이나 새벽에 불쑥 호텔, 백화점, 롯데월드 등에 나타나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손수 줍기도 하고 고객용 일회용 컵이 떨어진 것 하나까지 잡아냈다.
한번은 신 총괄회장이 복도를 걷다가 곁에 있던 임원에게 텅 빈 코너를 가리키며 “왜 저기 자판기가 없지”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곳에 자판기만 설치하면 월 수백만 원의 수익을 낼 수 있는데 그냥 놀려두었다는 지적을 한 것이다. 현장을 누비며 터득한 ‘돈에 대한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고집스러운 안전제일
특히 신 총괄회장은 안전 책임자에게 “불내지 마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유난히 화재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했는데 과거 백화점 폐기물 적치장에 불이 나 연기가 매장으로 들어온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가장 먼저 현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상무이사를 맡고 있던 이인원 롯데 정책본부 부회장이 현장으로 내려가 보니 화재와 누전 위험으로 전기까지 나간 상황에서 신 총괄회장 홀로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 원인을 살펴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 총괄회장은 매장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 것은 개의치 않아도 직원 통로에 꽁초가 떨어져 있으면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때문에 롯데그룹 건물 곳곳에는 금연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으며 한때 ‘흡연 적발 시 지위를 막론하고 퇴사조치를 한다’는 경고문까지 붙기도 했다.
# 최고를 위한 도전과 집념
신 총괄회장은 껌으로 대기업을 일궈낼 수 있었던 비결로 ‘최고 품질을 위한 끝없는 도전’이라고 말한다. 1952년 일본에서 설탕 유통 통제가 풀릴 당시 그는 연구원에게 “품질로서 판가름 나는 시대가 온다. 연구비에 돈을 아끼지 말고 선발 브랜드에 지지 않는 껌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엽록소를 첨가한 껌이 발매됐고 이후 다양한 신제품이 개발돼 매출 상승을 견인했다. 제품 질에 대한 그의 고집스러움은 초콜릿 개발자로 스카우트됐던 스위스 출신의 장인도 놀라게 했다.
“신설 공장 설계부터 원료 선택까지 모든 것을 맡기겠다. 원가 높아도 상관없다. 어쨌든 당신 나라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주소.”
단 한 번도 원가를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듣지 못했던 초콜릿 장인은 그의 말에 최신 설비를 도입해 1964년 첫 작품인 ‘롯데 가나 밀크초콜릿’을 탄생시켰다. 최고 제품에 대한 도전과 집념이 오늘날의 롯데를 만들어낸 것이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청년 신격호가 일본으로 간 까닭 가난 벗으려…‘문학도’ 꿈 접고 홀로 현해탄 건너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 상남면 둔기리에서 10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만 7세를 채우지도 못하고 삼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급생보다 어린 탓에 체격이 작은 학생이었다. 신 총괄회장의 학창시절 기록을 살펴보면 썩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일본 (주)롯데의 젊은 사장 신격호. 상급학교 기록을 보면 “수업 시간에 옆을 본다. 태만하지는 않지만 싫증을 잘 내는 성질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학업 성적도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5~7점에 불과했다. 이는 57명 가운데 40등 이상의 하위권 성적이이다. 또 등하교 거리가 멀었던 탓인지 매년 30일가량의 결석했던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친척의 경제적 지원으로 울산농업보습학교(현 언양중학교)에도 진학했지만 이곳에서도 성적은 부진했다. 다만 이때부터 지금의 신 총괄회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지 않은 덩치지만 행동거지는 무겁고 또래답지 않게 말수가 적다. 바둑을 취미로 둔 소년’이라는 담임교사의 평이 남아있는 것. 졸업 후 신 총괄회장은 1년간의 연수과정까지 마치고 조혼 풍습에 따라 열여덟의 나이에 노순화 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가정도 꾸리고 평범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신 총괄회장은 “고향에 살다 하도 가난해서 일본에서 공부해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해내고 마는 성격답게 친척들에게 당시 면서기 두 달 치 월급이던 83엔을 빌려 가족 몰래 1941년 현해탄을 건넜다. “우유, 신문 배달, 공장 파트타임 잡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고학생 신분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신 총괄회장의 꿈은 사실 작가였다. 틈만 나면 헌책방으로 달려가 독서를 했고 작가가 되기 어려우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도 꿨다. 하지만 문학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신 총괄회장은 와세다고등공업학교(현 와세다대)에 야간부 화학과 입학한다. 이때 배운 지식은 1947년 비누와 포마드 등을 만드는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박] |
참고서적 <신격호의 비밀> 정순태, 지구촌, 1998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손정목, 한울, 2003 <롯데와 신격호, 도전에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 임종원, 청림출판, 2010 <신격호는 어떻게 거인 롯데가 되었나> 김태훈, 성안북스,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