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시리즈일 경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터미네이터> 1편부터 얘기가 시작될 것이다. 캐스팅 목록 역시 비슷한 흐름이다. 에밀리아 클라크가 사라 코너 역할을 맡아 존 코너를 임신하기 전 처녀 시절을 연기하며 제이 코트니가 1편 당시의 카일 리스 역할을 맡았다. 남녀 주인공이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라면 터미네이터 1편에 가깝다. <터미네이터2>의 주역인 아역 존 코너의 캐스팅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는 상황에서 2편의 악역이던 T-1000은 이병헌이 맡았다. 게다가 미래에 존재하는 인류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 역할로 제이슨 클락이 꽤 비중 있게 출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편과 2편, 그리고 미래인 4편까지 혼재된 캐스팅 목록이다.
캐스팅 목록에 이어 공개된 정보는 영화의 줄거리다. 기본 줄거리 역시 살펴보자.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의 탄생을 막기 위해 스카이넷은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부하 카일 리스가 뒤를 따른다.’
: 여기까지만 보면 <터미네이터> 1편의 내용이다.
‘어린 사라 코너와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T-800은 로봇과의 전쟁을 준비하며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런데 이 부분에 오면 <터미네이터1>과 <터미네이터2>가 묘하게 겹쳐진다. 1편에서 T-800, 그러니까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사라 코너의 목숨을 노리는 악역이다. 그런데 2편에선 존 코너가 사라 코너와 어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낸 선한 역할이다. 여기서 신형 T-1000이 등장해 악역을 맡는다.
‘시간의 균열로 존 코너 역시 과거로 오지만 그는 나노 터미네이터 T-3000으로 변해있었던 것. 이제 인류는 인간도 기계도 아닌 그 이상의 초월적인 존재, 사상 최강의 적에 맞서 전쟁을 벌여야만 한다! 마침내, 인류의 운명이 결정된다!’
: 이 부분은 새로운 내용이다. 미래의 존 코너가 과거로 돌아오는 것은 처음 시도되는 설정이다. 어린 존 코너는 2편의 주인공이었으며 청년 존 코너가 3편의 주인공이었다. 또 미래 시점에서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는 4편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5편에 해당되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선 미래의 존 코너까지 처음으로 과거로 온다. 결국 줄거리 역시 1~4편이 혼재된 내용으로 보인다.
뚜껑이 열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리부트 시리즈가 아닌 연속성을 가진 5편이자 시리즈의 최종편으로 보인다. 리부트(Reboot)는 ‘시리즈의 연속성을 버리고 새롭게 처음부터 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1~4편의 내용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 다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터미네이터> 1편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
4편의 배경이었던 2018년보다 11년 뒤인 2029년이 배경으로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는 카일 리스와 함께 LA 공격 작전에 참가한다. 같은 시간 콜로라도 부대가 스카이넷의 코어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며 스카이넷 기계 군단과의 오랜 전쟁에서 비로소 인간 저항군이 승리한다. 그렇지만 존 코너는 파괴되기 직전 스카이넷이 LA 기지에 있는 타임머신을 사용해 막판 반격을 시도했음을 알게 된다. 존 코너 역시 이를 우려해 카일 리스와 함께 주요 격전지인 콜로라도 대신 LA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다. 스카이넷의 노림수는 역시 존 코너를 임신하기 전에 사라 코너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존 코너는 타임머신을 활용해 자신의 아버지가 될 카일 리스를 역시 과거로 보낸다. 그렇게 다시 <터미네이터> 1편의 내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체크해야 하는 부분은 과거 <터미네이터> 1편에서의 1984년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1984년은 서로 다른 타임라인이라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기억하는 1편 당시의 1984년으로 돌아간 것이라면 리부트 시리즈겠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1984년은 타임머신으로 과거와 미래를 오간 이들로 인해 새롭게 만들어진 타임라인의 1984년이다. 아무 정보도 없이 T-800의 공격을 받은 애초 타임라인의 사라 코너와 달리 이번 타임라인의 1984년에 사는 사라 코너는 미리 와 있던 T-800의 도움을 받으며 T-1000 공격을 대비하며 카일 리스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스카이넷을 파괴하기 위해 1997년이 아닌 2017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기존 타임라인에선 21세기가 되기 전 스카이넷이 ‘심판의 날’에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하지만 새로운 타임라인에선 스카이넷이 2017년에야 완성된다.
2편부터 5편까지 존 코너의 변화
결국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기존 시리즈에서 이어지는 2029년에서 시작해 새로운 타임라인의 1984년을 거쳐 2017년의 이야기가 핵심이다. 게다가 2017년에는 미리 미래에서 온 존 코너가 기다리고 있다. 2029년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카일 리스를 과거로 돌려보내는 상황에서 스카이넷의 마지막 공격을 받은 존 코너는 나노 터미네이터 T-3000이 된다. 따라서 2017년의 존 코너는 인간인 인간 저항군의 리더가 아닌 나노 터미네이터 T-3000이다. 따라서 그는 스카이넷을 돕는 악역이다. 그렇게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는 자신들의 아들인 존 코너와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따라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핵심 키워드는 부모와 아들이 시간을 초월해서 벌이는 골육상쟁이다. 그렇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던 존 코너는 5편에 이르러 패륜아가 되고 말았다.
1편부터 5편까지의 캐릭터 구도를 살펴보자. 1편은 사라 코너와 카일 리스가 주인공이며 T-800이 악역이었다. 2편은 사라 코너와 어린 존 코너, 그리고 T-800이 주인공, T-1000이 악역이다. 3편에선 청년 존 코너와 T-800이 주인공, T-X가 악역이다. 여기까지가 심판의 날 이전 시리즈다.
4편은 부제부터 ‘미래전쟁의 시작’으로 심판의 날 이후인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인간 저항군의 리더로 성장하고 있는 존 코너가 주인공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혼돈하는 마커스 라이트도 주연급이며 카일 리스는 조연급으로 출연한다. 악역은 전면에 나선 스카이넷과 기계 군단이다.
그런데 5편에 해당되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처음으로 존 코너가 악역이 됐다. 1편에서도 직접 출연하진 않았지만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낸 존 코너는 숨겨진 주인공이었으며 2~4편에서 거듭 주인공으로 스카이넷에 맞서 싸우던 존 코너가 5편에서 갑자기 스카이넷의 오른팔이 됐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마니아들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선악 구도다.
1편부터 5편까지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변화. 미래 시점인 4편에만 출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런 결정은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존재감 때문으로 보인다. 스토리를 놓고 볼 때 <터미네이터>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은 존 코너다. 그렇지만 타이틀롤인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존재는 늘 존 코너를 압도해왔다. 1편에서의 악역은 물론이고 2편에서의 어린 존 코너와 슈워제네거의 우정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그리고 미래를 배경으로 한 4편에서 슈워제네거는 우정 출연 수준이었다. 미래에서 과거로 보낸 T-800이라는 설정이 미래 시점에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며 그는 더 이상 근육질의 터미네이터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늙었다.
5편 역시 4편에 이어 미래 사화의 미래 전쟁을 그릴 경우 다시 슈워제네거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존 코너만 남는다. 그러다 보니 다시 또 다른 타임라인인 과거, 우리 시점으로는 현재로 이야기 구도를 바꾸면서 T-800 역할의 슈워제네거에게 존재감을 불어 넣었다. 물론 그는 늙었다. 그렇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T-800은 미래에서 70년대로 보내져 사라 코너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왔다는 설정이다. ‘속은 기계이지만 겉은 인체조직인 T-800’이라는 사이보그 설정으로 나이 제한을 극복했다. 세월이 지나도 기계는 멀쩡하지만 겉을 둘러싼 인체조직은 노화하게 돼 있다는 것. 늙은 슈워제네거의 겉모습은 인체조직이 노화한 것일 뿐 속의 기계는 멀쩡하다는 게 이 영화의 기막힌 설정이다. 이렇게 슈워제네거의 존재감을 되살린 설정은 좋았지만 이를 위해 시리즈 전체의 주인공이던 존 코너는 악역이 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스카이넷의 진화다. 우선 이 부분 역시 과거와 다른 타임라인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스카이넷이다. 기본적으로 1~4편의 스카이넷은 5편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초반부에 파괴된다. 그렇지만 타임머신으로 과거의 변화를 시도하고 존 코너까지 터미네이터로 만든 스카이넷은 새로운 모습으로 2017년 새롭게 탄생한다.
본래 스카이넷은 군사방위 프로그램이었다. 그렇지만 5편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스카이넷은 2017년에 본격 서비스를 시작하는 운영체계 프로그램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컴퓨터에 자동차까지 전부 연결하는 신개념 프로그램으로 제임스 카메론이 지난 1984년 당시의 과학 기술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요즘같은 스마트폰과 SNS 세상에 어울리는 새로운 개념의 프로그램이다. 1편이 나온 1984년부터 5편이 나온 2015년, 무려 30여년의 세월 동안 달라진 IT 과학기술이 스카이넷의 진화까지 이끌어 낸 셈이다.
리부트 시리즈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시리즈의 5편으로 최종편이 되고 말았다. 존 코너의 도움을 받아 2017년을 기점으로 부활하려던 스카이넷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타임라인이 공존한다는 새로운 설정을 통해 또 다른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제작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1편부터 이어져 온 미래전쟁이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 저항군의 승리로 마무리됐고 억지로 타임라인을 바꾸고 존 코너까지 악역으로 만든 상황에서의 새로운 시리즈는 억지 설정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게다가 존 코너까지 악역이 돼 몰락한 상황에서 카일 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더욱 기괴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슈워제네거의 존재감을 위해 존 코너를 악역으로 만든 설정이 결국 시리즈의 종결을 야기하고 말았다.
사실 존 코너의 악역 변화는 80~90년대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열광하던 영화팬들에겐 추억을 빼앗긴 것과 같은 재앙이기도 하다. 존 코너 역할은 연령대에 따라 시리즈마다 다른 배우가 맡았다. 그렇지만 가장 대표적인 배우는 <터미네이터2>에서 어린 존 코너 역할을 맡아 T-800 역할의 슈워제네거와 우정을 나눈 에드워드 펄롱일 것이다. 마약 중독, 아내 구타, 정신병원 입원에 성상납 루머 등으로 몰락한 에드워드 펄롱에 이어 이번엔 존 코너라는 캐릭터까지 몰락했다. 진정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1편과 2편에서 마무리되고 3편 이후는 제작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