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김무성 대표와 이미 등을 돌린 친박계는 내년 총선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져있다. 7월 16일 청와대에서 만난 박근혜 대통령(왼쪽)과 김무성 대표. 연합뉴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박 대통령의 권력 누수 현상이 눈에 띌 정도로 심해지고 있다. 내년엔 본격적인 레임덕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김무성 대표가 이끄는 당과 청 관계 역시 겉으로만 원만해 보일 뿐 속을 들여다보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다. 내년 총선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친박 내부에 퍼져있다”고 귀띔했다. 거의 와해 직전까지 갔다는 평을 들었던 친박계가 유승민 전 원내대표 거취를 둘러싼 논란 이후 빠르게 재결집한 것 역시 이런 기류가 밑바탕이 됐을 것이란 관측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 이러한 상황을 대비한 모종의 대책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는 것이다. 현 구도로는 박 대통령 집권 중반기 이후가 험난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앞서의 친박계 중진 의원이 털어놓은 내부 속사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 대선 캠프 출신의 한 원로급 인사는 “솔직히 지금의 새누리당은 ‘김무성 당’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논의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다시 ‘박근혜 당’으로 되돌릴 수 있느냐였다”면서 “나를 비롯한 원로그룹과 몇몇 자문교수, 그리고 전·현직 의원들이 서울 모처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방안에 대해 ‘스터디’를 진행했다”고 귀띔했다.
사실 그동안 창당설, 분당설, 합당설 등 정계개편을 둘러싼 이슈들은 주로 야권 진영의 ‘단골 메뉴’였다. 박근혜 정권 출범 후 새누리당발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 6월 국회법 개정안 파동 당시 친박계 내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탈당할 수도 있다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치권에선 ‘소설 같은 얘기’라며 일축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여권 핵심 관계자들 역시 박 대통령이 탈당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을 ‘내가 키운 당’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천막당사부터 지난 2012년 비대위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었느냐. 비록 당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새누리당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탈당하진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권 핵심부가 창당까지를 염두에 둔 ‘파격적인’ 정계개편 밑그림을 그렸었다는 것은 그만큼 친박계의 위기감이 심상치 않음을 나타낸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바꿔 말하면 박 대통령 입장에선 힘들게 키운 당의 주도권을 김무성 대표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느냐. 정권 주류 세력인 친박계 핵심들이 새누리당 구도 재편 논의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한 차원이라며 평가절하하는 기류도 읽힌다. 이에 대해 앞서의 친박 원로 인사는 “정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DJP 연합이나 노무현-정몽준 연대를 그 누가 상상했겠느냐. 앞으로의 정치 상황에 따라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했던 것들이 구체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들이 논의됐던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요신문>은 그 과정에 참여했던 복수의 친박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이들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비주류 김무성 대표와는 ‘한 배’를 타기 어렵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정치권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다. 과거 사례를 보면 대통령 후보들은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때론 탐탁지 않은 세력과도 손을 잡는다. 그러나 정권 출범 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 이들과 결별하는 게 부지기수였다. 박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한때 관계가 소원했던 김 대표에게 ‘SOS’를 보냈고, 김 대표는 백의종군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친박계는 김 대표를 더 이상 우군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박 대통령 집권 후반기와 퇴임 후를 보장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의구심만 가득 찬 상황이다. ‘결별 선언만 남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를 두고 여권 핵심부가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YS는 임기 4년차이던 지난 1996년 2월 여당이던 민자당 해체 작업에 착수했다. 대신 외부 인사들을 대거 수혈해 신한국당을 만들었다. 이회창 전 총재,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재오 의원, 박찬종 전 의원 등이 이 때 정치에 입문했다. 이 중 이 전 총재는 유력 차기 후보로 급부상하며 두 차례나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신한국당은 같은 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이기며 후반기로 접어든 YS의 국정 운영에 힘을 보탰다. ‘정치 9단’으로 통하는 YS로선 총선 승리와 후계자 찾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던 셈이다. DJ도 3년차이던 2000년 총선을 대비하기 위해 JP(김종필 전 총재)와 결별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지만 총선에서 패하며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친박계가 DJ보다는 YS식 모델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경파는 비주류 좌장인 김 대표를 축출하고 아예 원점에서 새로운 신당을 만들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친박계를 중심으로 창당하자는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율과 TK(대구·경북)지역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엔 지난 2008년 총선에서 공천 학살을 당하고도 ‘친박연대’로 기사회생했던 것처럼 ‘선거의 여왕’ 박 대통령이 지원사격을 해주면 내년 총선에서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앞서의 친박계 재선 의원은 “친박연대 때도 박 대통령은 직접 선거에 관여하진 못 했다. 현직 대통령이라면 아마 더 그럴 것이다. 또 임기 후반기로 갈수록 박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면서 “김 대표가 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하면 어쩔 것이냐. 여권은 분열하게 된다. 김 대표를 몰아낸 뒤 친박 위주의 신당을 만들자는 얘기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어찌됐건 여권 핵심부의 이러한 구상은 차기 선두주자인 김 대표를 배제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향후 김 대표와의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점쳐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물론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친박계가 과연 김 대표 측과 맞설 수 있느냐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달린다. 친박이 ‘살아있는 권력’인 박 대통령을 등에 업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 권력’ 김 대표와 일합을 겨루기엔 그 세가 너무나 약한 까닭에서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정계개편을 주도하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한다. 친박이 믿고 있는 박 대통령은 내년부터 레임덕에 휩싸일 것이다. 여권 핵심부가 구상했다는 시나리오는 구체화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