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13년 12월 12일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바로 집행했다. 양손을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에 서 있는 장성택. YTN 화면 캡처
이 견고한 판도라 상자도 틈은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들어 그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진짜 김정은 이야기’는 필자 본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와 직접 소통하는 복수의 북한 내부 고위관계자들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다. 그 첫 번째는 김정은 후계세습 및 체제성립의 가장 큰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장성택 숙청’ 내막이다. 그가 숙청된 것은 2013년 12월이지만, 그 공포의 그림자는 훨씬 이전부터 드리웠다.
시간을 7년 전으로 돌려보자. 지난 2008년 8월 17일,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돌연 쓰러졌다. 병명은 뇌졸중. 당시 김정일의 상태는 반신불수 설이 나돌 정도로 심각했다. 그렇게 3개월간 그는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병상에서 보냈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때는 그 해 11월 말과 12월 초 사이였다. 정상적인 거동은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북한은 그를 둘러싼 5명의 친인척인 소위 ‘문고리권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세 번째 부인 김옥(51), 여동생 경희(69), 차녀 설송(42), 삼남 정은(31), 그리고 처남 장성택(2013년 처형 당시 67)이 이에 해당했다.
당시 김정일이 쓰러진 사실은 외부는 물론 북한 핵심 지도층 내부에서도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졌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은 체제 위기나 다름없었다. 앞서의 친인척 이외에 김정일 곁을 지키는 호위총국(북한 최고지도자를 경호하는 특수기관으로 우리의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의 근접경호원들을 비롯하여 핵심 측근 몇몇 인사들 정도만 그의 건강 이상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 이상한 낌새가 감지됐다. 아니, 단순한 낌새 정도가 아니었다. ‘난리가 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조직지도부에 장성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음을 감각적으로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장성택은 문고리권력을 기회로, 조직지도부에 자기 사람을 심거나 새판 짜기를 아주 은밀하게 추진했다. 리제강, 리용철 조직지도부 1부부장 휘하의 반대 세력들에 대해선 각종 명목으로 음해공작과 숙청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한때 북한 내에서는 중앙당 행정부보다 중앙당 조직지도부가 한 수 아래라는 소문이 돌았다.
더욱이 ‘문제’가 생긴 후 그 일처리를 위해 필요한 뇌물(주로 외화현금)이 조직지도부 라인을 이용하는 것보다 행정부 라인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은 조금 더 들지만 확실하게 해결된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이후 리용철과 리제강은 각각 2010년 4월과 6월 공식적으론 심장마비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장성택이 제거했다는 설을 알 만한 최고위층들 속에서는 더 신빙성 있다고 믿는다.
북한의 중앙당 조직지도부는 체제 내 조직 관리와 주요 인물들의 검열과 인사를 관장하는 당의 핵심 권력조직으로 실권을 가진 집행기관이다. 때문에 김정일은 1973년과 1974년에 조직지도부장 및 조직비서 직에 올라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2011년 사망 전까지 부장 및 조직비서 직을 유지했으며, 이후 부장 및 비서직은 공석으로 남아있을 만큼 그 조직의 상징성은 대단하다.
이 시기 조직지도부에서 장성택에 대한 불만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당 행정부장이 최고지도자의 친인척이란 이유로, 또 개인의 권력적 야욕으로 자신들의 견고한 조직시스템을 뒤흔들어놨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러한 조직지도부의 불만은 장성택 제거를 위한 빌미로 작용한다.
김정일의 차녀 설송은 그 일련의 과정을 병상에서 일어난 김정일에게 즉각 보고했다. 한평생 북한 1인 독재 권력의 막후정치를 업으로 삼아온 김정일이다. 누구보다 권력의 습성을 잘 알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감지하는 ‘촉’은 그가 살면서 자연스레 발달됐다. 단지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를 쉽게 쟁취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은밀하게 영역을 확대하려는 장성택의 속내를 이때부터 직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정일 입장에서 장성택은 애증의 존재였다. 장성택은 김일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일한 동복동생 경희와 부부의 연을 맺는데 김정일의 지원을 톡톡히 받았다. 때문에 장성택은 손위처남 김정일의 후계세습 시기, 당 내에서 김정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거의 실세라는 권력을 쥐게 되었다.
김정일이 김성애와 김평일을 비롯한 곁가지들을 쳐내고 오늘의 북한 세습후계 체제 성립에 가장 큰 기여를 한 3개의 안전 축이 있다. 바로 ‘군’에서는 오극렬, ‘외교’에서는 허담, ‘당’에서는 장성택이다. 그렇지만 이따금 장성택이 ‘선’을 넘거나 야욕을 드러낼 때마다 가차 없이 눌러버렸던 것도 김정일이었다.
장성택은 1978년 당 간부들과 난잡한 파티를 벌인 명목으로 첫 번째 숙청(2년간 혁명화 교육)을 경험했으며, 2004년에는 당 자금 남용과 파벌정치를 한 혐의로 두 번째 숙청을 경험했다. 물론 매번 처 김경희와 손위처남 김정일의 ‘아량’에 의해 항상 권력 핵심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하는 민감한 시기, 세 번째 자비를 베풀 여유가 이제 더 이상 김정일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후계자로 염두에 둔 정은의 힘을 길러주는 것과 동시에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김정일 본인 생전에 제거해야만 했다. 이 작업이 김정일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깨어난 2008년 말부터 차근차근 시작됐다. 다시 말하자면, 장성택을 제거하는 프로세스가 이때부터 은밀하게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만 해도 장성택 본인은 아직 이러한 김정일의 은밀한 속내와 이미 무르익기 시작한 ‘죽음의 프로세스’에 대해 감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옆에서 보아온 김정일을 쉽게 보았을 우려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김씨가문’의 독재 권력을 건드려본 자만이 자칫 자신의 실제 능력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다.
분명한 점은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인해 권력 정점에서 잠시나마 내려오고, 이로 인해 생긴 빈공간은 장성택에게 있어선 절호의 기회였다. 김정일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웠으며, 후계자로 점지된 김정은은 나이로나 경험으로나 아직 부족했다. 후에 구체적으로 기술하겠지만, 더군다나 장성택의 뒤에는 중국이 든든한 지원군으로 버텨주고 있었다. 내심 조카 김정은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본인이 실권을 행사하는 바람직한(?) 국정운영 그림이 단박으로 그려질 듯했다.
당시 김정일은 장성택의 이 음흉한 마음을 감지했지만, 장성택 제거를 당장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이 우려되어 3대 후계 체제 존립이 위협을 받고 있는 현재 어찌되었건 장성택이 아직은 필요했다. 과거 자신이 권좌를 위한 투쟁에서 우위를 점할 때처럼 말이다. 그만큼 정은이 아직 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정일이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행한 조치는 정은에게 국가안전보위부를 맡긴 일이다. 김정은은 2009년 4월, 아버지에 의해 국가안전보위부장으로 임명됐다. 김정은의 나이 고작 스물다섯 때의 일이다. 이는 뒤에서 따로 취급하겠지만 복수의 신뢰할 수 있는 소식통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 내 최고의 초법적 정보 및 안보 권력기관이다. 보위부는 북한 내 모든 조직을 감시한다. 한국의 국가정보원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그 권한과 위상 및 역할은 상상 그 이상이다. 김정일은 정은에게 안보권력을 틀어쥐게 했다. 당 내에서 경쟁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면서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게끔 최상의 환경을 마련해줬던 것이다.
이는 당 행정부의 책임자이자 조직지도부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성택의 힘을 빼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김정은은 이 시기부터 후에 보위부장 자리를 물려주게 되는 김원홍(당시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나 김영철(당시 정찰국장, 이후 정찰총국장으로 임명) 등 자기만의 세력을 대동하기 시작한다. 이 역시 장성택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던 셈이다.
2005년 10월 10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창건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한편으로 김정일은 군에도 손을 댔다. 오극렬의 힘을 빼기 시작한 것. 오극렬이 누구인가. 공군 파일럿 출신으로 군의 요직을 두루 거친 오극렬은 김정일이 군내에서 가장 믿을 만큼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김정일 외에 중앙당 핵심 권력부서의 부장으로 20년 이상 자리를 지킨 유일한 인사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김정일과 같은 혁명 2세대(오극렬의 아버지는 빨치산 1세대 오중성이다)로서 둘도 없는 술친구 및 ‘의형제’로 알려진 오극렬은 한마디로 군부 최고실세였다.
김정일은 2009년 2월 군부의 정찰총국 내 조직,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의 대남작전부서와 해외작전부서를 군의 정보조직에로 통·폐합시킨다. 오극렬을 못 믿어서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권력의 습성’을 못 믿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특히 군의 힘과 역할이 비대해진 북한 선군체제에서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정은의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군에서 정은의 위치는 아직 김일성 군사종합대학의 마지막 학년을 다니는 ‘졸업학년학생’ 신분에 불과했다. 군을 통제하고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지재룡 대사
2004년 장성택이 숙청됐을 당시, 그 역시 장성택의 최측근으로서 잠시 당 국제부 부부장 자리에서 사라지며 고통을 함께했다. 대부분의 대북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함께 처형될 인물로 지목된 이는 다름 아닌 그였다. 하지만 그는 건재했다.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선 그의 생존을 두고 ‘그가 장성택을 배신했다’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지재룡은 김정일에 의해 특명을 받고 비밀리에 포섭돼있었다는 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체크된 사안이다.
김정일은 지재룡이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두 가지를 지시했다. ‘첫째, 장성택-장남 김정남, 장성택-중국 정부(구체적으론 국가안전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특별히 조사하고 감시할 것. 둘째, 만의 하나 이와 관련해 위급하거나 이상 징후가 나타날 경우 즉각 보고할 것….’ 장성택 입장에선 김정일이 몰래 쳐 놓은 덫이 자신의 지근거리에 도사리고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 김정일의 덫은 정은에게 유훈으로 이어지게 되고, 훗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정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필자 이윤걸은? 그는 북한의 이공계 명문인 리과대학 학부와 준박사(동물생리학) 과정 졸업 후 호위사령부 산하 청암산연구소(일명 김일성장수연구소) 연구사로 근무했다. 2005년 중국을 통해 입국한 그는 잠시 대한민국 농진청 농업생명공학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생명공학 박사 및 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본격적으로 북한전략정보 전문가로서의 활동에 투신한 이후 김정은, 최룡해 등 북한의 3대 세습 시기 최고 실세들이 본격 등장한 2010년 9월 28일 당대표자회를 최초로 예고했다. 2012년 11월에는 저서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를 통해 김정일의 유서를 국내에 최초 공개하기도 했다. 이미 그 책에서 오늘의 장성택 숙청을 예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