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업계가 포스코의 철근·봉강시장 진출 소식으로 시끄럽다. 이 같은 포스코의 변화는 생존을 위해 더 이상 과거의 역사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권오준 포스코 회장(사진)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종현 기자
철근과 H형강은 건물이나 아파트, 교량 등을 건설할 때 콘크리트 보강용으로 사용하는 기초 자재를 말한다. 일정 규격의 품질만 갖추면 생산이 가능한 범용제품으로 포스코는 중견기업들의 판로를 배려하기 위해 시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봉형강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하니 경쟁사들로서는 난처할 수밖에 없다.
철근을 비롯한 봉형강 시장은 현대제철과 동국제강, 대한제강, 한국철강, YK스틸, 환영철강 등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철스크랩을 구매해 전기로에 녹여서 만든 쇳물로 반제품인 빌릿과 블룸을 만든 뒤 이를 가공해 완제품을 만든다.
최근 철스크랩 가격이 내렸다지만 대부분 철스크랩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고, 쇳물을 만드는 전기로는 엄청난 전기요금이 들기 때문에 생산단가가 높다. 중국산 철근 및 H형강이 봇물 쏟아지듯 수입되면서 내수시장을 단기간에 빼앗긴 이유도 생산단가 이하인 중국산 제품에 가격으로는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산 수입 문제는 결국 우리 정부가 반덤핑 판결을 내려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다. 이런 가운데 느닷없이 포스코가 치고 들어오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제철소, 또는 계열사의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아닌, 해외 계열사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겠다고 한다.
POSCO SS VINA의 연간 생산능력은 철근 50만t, H형강 50만t으로 알려졌는데, 이들 제품을 수입하겠다는 것은 당장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판로 확보가 여의치 않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베트남은 중국보다 인건비가 싸고 또한 베트남 정부는 해외 투자기업에 대해 세제상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런저런 요소를 반영하면 베트남산 포스코 철근과 H형강의 가격 경쟁력은 상당할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산 제품보다 비싸지만 한국산 제품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이 책정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럴 경우 중국산 제품의 수입 대체라는 긍정적 효과보다는 한국산 제품의 시장 점유율 하락이라는 부정적인 면이 더 클 것으로 우려된다.
봉형강 제품을 생산하는 철강업계 고위 관계자가 “포스코가 골목상권에 뛰어들 줄은 몰랐다. 이건 상도의가 아니다”라며 입이 마르도록 비난을 하는 이유다. 이 관계자는 “상위 5개사는 그럭저럭 견디겠지만 중하위권 업체들에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시장이 뒤집어지면 이들 업체들은 생산을 포기하고 포스코의 대리점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 이미 국내 건설사 상대로 영업 들어가
업계 반발에도 불구하고 포스코 영업부서에서는 이미 국내 건설사들을 상대로 영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포스코로서는 봉형강 시장 진출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 들어 건설경기가 회복되면서 판매가 잘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철근과 H형강은 최근 수년간 철강업계와 건설업계 간 가격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대표적인 품목이다. 다시 말해 수익보다는 욕을 더 먹는 제품이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포스코가 시장에 뛰어든 이유는 결국 외연을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고 있는 현대제철을 견제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고로 건설, 현대하이스코와 합병, 동부특수강(현 현대종합특수강) 인수 등을 연이어 이뤄낸 현대제철은 쇳물생산, 제강, 선재, 철근, 봉강, 형강, 열연강판, 중후판, 냉연강판, 스테인리스스틸 강판, 표면처리 강판(응용아연, HGI, 전기야연, 컬러강판), 강관, 특수강까지 철강과 관련한 제품 대부분을 생산하는 종합 철강사로 발전했다. 포스코보다 제품 포트폴리오가 훨씬 많아진 것이다.
건물이나 교량 등을 건설할 때 콘크리트 보강용으로 사용하는 H형강.
여기에 현대제철은 현대·기아자동차, 현대건설, 현대로템, 현대위아 등 철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수요업체가 계열사로 대거 포함돼 있다. 범현대가로 범위를 넓히면 현대중공업 등까지 포함된다. 이미 포스코의 전체 매출에서 현대·기아차에 대한 비중은 최대 4%에 육박하다가 지금은 2%대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벌어졌다. 범현대가 매출 비중은 5%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봉형강 시장 진출 결정으로 포스코는 현대제철이 내수시장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시장에서 맞불을 놓게 됐다. 사실상 정면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포스코는 베트남산 봉형강 제품을 수입해 시장에 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설 프로젝트에 수요제품을 패키지로 공급하는 방법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고객 맞춤활동(EVI)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포스코가 차지하고자 하는 국내 철근시장 점유율 목표는 1% 내외로 잡고 있다. 현대제철의 시장점유율은 27%, 동국제강은 22% 수준이다. 1%는 기존 시장의 구도를 흔들지 않으면서 현대제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상징적인 숫자인 셈이다.
# 인도네시아산 후판 수입도 머지않은 듯
철강업계에서는 현대제철과 동국제강이 포스코를 찾아가 봉형강 시장 진출을 정식 항의했지만 포스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포스코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미 현대제철이 시장의 룰을 깨고 철강제품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코가 시장의 원활한 성장을 위해 특수강 사업을 포기한 반면, 현대제철은 오히려 사업을 더 키워 중견업체들의 자리를 빼앗았고, 증산된 후판 판매를 위해 범현대가인 현대중공업 그룹을 부추겨 동국제강이 판로를 잃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현대제철이 포스코에 항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게 포스코의 속내다.
포스코는 베트남산 봉형강 제품 수입이 성과를 거둘 경우 인도네시아에 건설한 일관제철소 계열사인 ‘PT 크라카타우포스코’에서 생산한 선박 건조용 후판을 들여올 가능성도 높다. PT 크라카타우포스코는 지난해 6월 일본에 후판을 첫 수출했는데, 품질 규격이 엄격한 일본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인도네시아산 후판은 중국산보다는 비싸지만 한국산에 비해서는 저렴해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저렴한 후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면 충분히 도입을 고려할 수 있다.
# “박태준 명예회장이 살아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이 같은 포스코의 변화는 생존을 위해 더 이상 과거의 역사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는 권오준 포스코 회장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됐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포스코는 국내 수요산업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대명제와 설립자인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정해놓은 원칙에 따라 영위할 사업을 분명히 구분해왔다.
하지만 이는 고로 일관제철소가 포스코 한 개 기업이었을 때 통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국내외 경쟁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뒤쫓아 오는데 포스코는 이를 너무 안이하게 대응해 왔다는 것이다. 권 회장이 “뛰자”고 외치는 이유다.
포스코는 뼈를 깎는 구조개혁을 통해 실적이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 성과를 보였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더군다나 최근의 실적 개선은 보유자산 매각, 생산량 조절 등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 진정한 사업 구조개편의 효과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권 회장은 임기 3년의 절반을 보냈다. 취임식에서 연임에 대한 미련보다는 3년 내에 ‘위대한 포스코(POSCO the Great)’를 이뤄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던 그로서는 이제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베트남산 철근 수입은 박태준 명예회장이 생존했던 시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결정이다. 하지만 권 회장은 이를 결정했다. 관건은 결과다. 결과가 좋게 나오면 권 회장의 경영은 성공적이라고 기록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또 다시 포스코를 흔드는 거대한 패착이 될 수 있다.
조정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