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표와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대 총선을 반년 앞두고 정면충돌했다. 사진은 2012년 11월 지난 대선 때 야권 후보 단일화 논의를 위해 첫 단독회동을 한 두 후보의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앞서 안 전 대표와 야권 발 정계개편 상수인 천정배 무소속 의원은 같은 날 오전 국회에서 단독 회동을 했다. 천 의원은 추석 전 공개될 예정인 전국신당에 안 전 대표의 동참을 요청했다. 또한 범주류인 정세균 상임고문의 ‘문재인 2선 후퇴’ 기자회견도 예정돼 있었다. 이 와중에 문 대표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문 대표는 “혁신안이 통과 안 되면 물러날 것”이라며 재신임 카드를 전격적으로 꺼내 들었다. 이는 10차 혁신안 발표까지 당을 흔들었던 비노계에 맞서 ‘재신임 카드’를 전면에 내걸고 당의 원심력을 꺾으려는 포석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은 크게 술렁였다. 친노계도 비노계도 당혹했다. 범친노계 한 관계자는 “혁신안 통과를 위한 고심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당무위를 통과한 혁신안은 이달 16일 중앙위원회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다만 친노계 다른 관계자는 “당 갈등이 심화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의견이 엇갈리기는 비노계도 마찬가지였다. 박지원 의원은 “당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충정”이라고 말했지만, 박주선·송호창 의원은 “‘친노 계파 뭉쳐라’라는 것”, “혁신안에 대해 이견을 말하면 해당행위라는 것” 등의 발언을 하며 날을 세웠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안 전 대표였다. 안 전 대표는 문 대표의 재신임 제안 직후 “재신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실망스럽다”며 “혁신안이 통과된다고 총선 승리 전망이 나아지느냐”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천 의원과의 단독 회동으로 당무위 혁신안 의결의 동력을 약화시킨 안 전 대표가 문 대표에게 연타를 날린 셈이다.
“2012년 대선 판의 반대 상황이다. 완전 반대….” 새정치연합 한 관계자가 ‘문재인·안철수’ 간 난타전과 관련해 던진 말이다. 실제 그랬다. 정치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보자. 2012년 ‘박근혜 대세론’을 격침한 것은 ‘안철수 현상’이었다. 콘크리트 지지율로 거침없이 대권가도를 달렸던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를 변방에 있던 안 전 대표가 침몰시켰던 것이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의 2012년 8월 셋째 주 조사 결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8%포인트)에 따르면, 차기 대선주자 양자 대결에서 안 전 대표는 48.8%로 당시 박 후보(44.5%)를 4.3%포인트 앞섰다. 안 전 대표 대신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가 들어간 조사에서는 ‘박근혜 48.5%, 문재인 41.0%’였다.
당시에는 문 대표가 후발주자로 골든크로스(지지율 역전 현상)를 꾀해야 했다면, 지금은 비주류로 밀려난 안 전 대표가 범야권의 대표주자로 거듭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얘기다. 가장 최근 조사인 <리얼미터>의 9월 첫째 주 정례조사 결과(95% 신뢰수준에서 ±2.0%포인트)에 따르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문 대표는 14.5%(3위), 안 전 대표는 8.5%(5위)를 각각 기록했다. 1위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로 24.1%였고, 2위는 박원순 서울 시장(14.9%)이 차지했다. 김상곤 혁신위가 출범한 이래 안 전 대표가 연일 친노계를 공격한 것도 야권 구도를 ‘문재인 vs 안철수’로 끌고 가려는 전략의 행보다.
눈여겨볼 대목은 문 대표 승부수에 담긴 함의다. 문 대표는 재신임의 전제를 깔았다. 친노 패권주의 극복 실패도 아니다. 대안정당·수권정당화의 실패도 아니다. ‘혁신안 부결’이다. 이달 16일 중앙위 의결에 실패한다면,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구당의 결단’으로 보인다. 비장미가 흘러넘친다. 하지만 여기에는 고도의 책략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 대표의 ‘조건부 재신임’으로 친노계는 총결집할 수밖에 없다. 당 분열을 우려하는 비핵심 비노계도 흔들릴 수 있다. 김상곤 혁신안의 의결 가능성이 한층 커지는 셈이다.
지난 9일 문재인 대표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혁신안이 중앙위 의결에 실패하면 재신임을 묻겠다”고 폭탄 선언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이 경우 문 대표는 내년 총선까지 대표직 유지의 ‘명분’을 챙길 수 있게 된다. 정세균 고문의 ‘연석회의 구성’, 비노계 내부에서 제기된 ‘비대위·조기 선대위’ 요구를 일거에 무력화할 수 있다. 그때까지 당 대표직을 유지한다면, ‘자기 사람 심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 이후 ‘안철수 대안론’이 나오든 ‘손학규 대망론’이 제기되든 야권 대선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문 대표 승부수에는 ‘명분과 실익 확보를 통한 대표직 유지→공천권 행사→차기 대권가도 터 닦기’ 등의 전략이 깔렸다는 의미다. 천정배 신당 등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단기전 대신 지구전으로 전략을 튼 셈이다.
친노계 한 관계자는 “문 대표가 두 번째 죽음의 고비 앞에 섰다”는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앞서 문 대표는 2·8 전국대의원대회 당시 “당 대표가 안 돼도, 당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도, 총선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도, 그다음 제 역할은 없다. 세 번의 죽을 고비가 제 앞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첫 번째 고비를 넘은 문 대표가 김상곤 혁신안을 두 번째 고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른 관계자는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친노계 내부에 문 대표가 직접 나서서 ‘문재인식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18대 대선 직후 친노계 관계자들은 대선 내내 새누리당뿐 아니라 당 비주류 세력에게 ‘친노 패권주의’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준 ‘이(이해찬)-박(박지원)’ 담합 과정을 많이 얘기했다. 문 대표는 당시 ‘이해찬 당 대표-박지원 원내대표’ 커넥션 논란이 일자, “담합이 아니라 단합”이라고 거들었다. 사실상 ‘계파 대변인’ 노릇을 자처한 것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선 “이해찬이 상왕 노릇을 할 것”이라는 극언이 쏟아졌다. 친노 패권주의 논란에 직격탄을 맞은 문 대표는 존재감 확보는커녕 ‘권력의지’ 논란에 휩싸이는 빌미만 제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이 달랐다. 혁신안의 당무위 통과 직후 재신임 승부수를 던졌다. ‘천정배·안철수’ 단독회동의 파괴력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문 대표의 이번 재신임 승부수를 두고 친노 내부에서 “문재인 중심의 판을 만들었다”고 자평하는 이유다. 다급한 쪽은 안 전 대표다. 타이밍 정치의 대명사인 안 전 대표는 졸지에 문 대표 승부수에 일격을 당했다. 대중성은 있지만, 약한 조직력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안 전 대표로선 세 규합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전면전을 선언한 친노계와의 ‘맞장 승부’에서 압승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게 됐다.
안 전 대표의 공격 무기는 역시 ‘타이밍 정치’를 통한 문 대표와의 ‘일대일’ 승부다. 세력은 천 의원과 비노계, 전선은 ‘구태 vs 혁신’이다. 안 전 대표는 천 의원과 재회동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대표 측근은 “필요에 따라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경우 김한길 전 공동대표를 필두로 박영선 전 원내대표, 김부겸·김성식 전 의원에다가 손학규 전 상임고문까지 합세하는 중도정당의 불씨가 되살아날 전망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문 대표의 ‘재신임’ 승부수는 큰 결단이지만, 친노계와 비노계의 극한 갈등으로 당 원심력이 한층 커질 수 있다”며 “친노계가 ‘문재인의 승부수 역설’에 걸리면서 야권 발 정계개편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양자의 승부는 전략의 디테일에서 판가름 날 것”이라고 밝혔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