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 | ||
한 의원의 간통 사건은 야당 인사의 비도덕성을 드러내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결국 한 의원은 의원직 사퇴는 물론, 기소돼 징역 1년을 복역했고, 가뜩이나 당시 관제 야당으로 평가절하됐던 민한당은 더욱 정권에 고분고분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안기부의 도청 공작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한 의원은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꽤 골치아픈 존재였다. “관제 야당의 오명을 씻고 제대로 야당 구실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그는 당시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할 ‘광주’ 문제까지 거론하기도 했다. 30대 젊은 나이에 9대(73년)와 10대 총선(78년)에 이어 잇따라 당선한 3선의 한 의원은 촉망받는 야당 의원이었다.
한 의원의 광주 문제 발언은 정권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안기부가 뒷 조사에 나섰던 것은 당연. 결국 안기부 도청팀이 한씨의 국제전화 도청으로 불륜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도청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유력 정치인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대상에는 전·현직 대통령들이 모두 포함된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정치 입문 직전 인권 변호사 시절이던 87년에 안기부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6월 민주화 항쟁을 주도하던 노 대통령은 당시 수사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집에 들어와 친구에게 딱 한 차례 전화를 했는데, 통화 후 불과 몇 분 만에 경찰이 찾아와 “서장이 당신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가보라고 해서 왔다”며 문밖에 지키고 서 있었다는 것.
YS는 야당 시절 하도 도청에 시달린 나머지 측근들에게 “상도동으로 전화해서 주요 보고를 하지 마라. 사실상 정보기관과 3자 통화를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DJ 역시 도청에 얽힌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동교동 자택의 전화 상태가 하도 안 좋아서 한번은 DJ가 성이 난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이놈들이 또 도청을 한다”며 욕을 하면 통화상태가 다시 좋아지곤 했다는 것. 당시에는 도청 장치를 설치하면 통화 상태가 현저히 떨어지는 시절이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시절 측근들에게 “상도동으로 전화보고하는 것은 정보기관과 3자통화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도청에 시달렸다고 한다. | ||
DJ 정권 당시 유력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또한 집중 도청 대상이었다. 전언에 의하면 이 전 총재는 아예 “어차피 하는 도청, 피할 수야 있겠느냐”며 짐짓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한 핵심 측근과 통화한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림이 없이 상세히 문건에 담겨진 채 정보 보고로 돌고 있는 것을 며칠 뒤에 직접 확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 전 총재는 통신 내용을 암호로 변환해 전송하는 도청 방지장치를 사용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6공에서 대선주자로 부각됐던 박태준씨 역시 도청과 관련, 피해를 봤다. 여당 대선후보로 YS가 확정된 이후 해외에 출국했던 박씨가 대선 투표일 귀국한 뒤 측근과의 통화에서 했던 “정주영씨가 유력하다더라”라는 취지의 말이 도청된 것. 이후 이 내용은 YS에게 보고돼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최근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미림팀 공운영 팀장으로부터 테이프를 넘겨받은 박인회씨(윌리엄 박)는 YS의 뉴욕 연락 담당격이었다”고 밝힌 장영달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역시 도청의 피해를 경험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이던 86년 수사 당국을 피해 숨어다니다가 이모집에 은신했는데, 어느날 이모집에서 자신의 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건 것이 결국 도청되어 곧바로 연행된 적이 있다.
야당의 국정원장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정보력을 자랑하는 전직 안기부 차장 출신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 또한 도청을 피하기 위해 예민함을 보였다. 정 의원은 휴대폰을 잘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당연히 도청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는 4~5개 이상의 휴대폰을 주변 측근들의 명의로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번호를 바꾼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대 정보기관에서는 왜 이런 도청에 열을 올렸던 걸까. 물론 정보 취합이 최우선이지만, 또 한 가지는 유사시에 대비한 건수 찾기 개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유력인사를 압박해야 할 상황을 미리 대비해서 도청을 통해 그 유력인사의 여자문제나 금전문제 등의 약점을 비축해두는 개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