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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22일 MBC 뉴스데스크의 한 장면. MBC 이상호 기자가 X파일 테이프를 들고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 ||
지난 7월21일 안기부(현 국정원)가 극비리에 운영했던 도청팀 ‘미림팀’에 대한 보도로 촉발된 ‘도청 X파일 사건.’ 시간이 갈수록 사건은 초대형 태풍으로 급속히 커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파일 속에 담겨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충격적인 내용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것. 더불어 안기부 담장 밖으로 유출된 X파일이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과거 ‘미림팀’이 도청했던 테이프만 2천여 개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5백여 개를 미림팀장 공운영씨가 빼돌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대한 분량의 테이프와 녹취록 등은 어떻게 처리된 것일까.
행방이 묘연한 X파일에 대해 국정원은 침묵하고 있다. 이에 ‘제2·제3의 X파일’이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점점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현직 대통령을 제외하고 각계각층의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상으로 도청 업무를 담당했던 ‘미림팀’. 공운영 전 미림팀장은 지난 99년 삼성측의 제보로 ‘유출 테이프’의 존재가 확인되자 국정원에 2백여 개의 도청 테이프를 반납했다. 여기에는 녹취록도 있었다. 당시 이를 회수한 안기부 관계자는 전량 소각 처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도청 테이프가 잔존하고 있느냐’에 대한 당시 국정원 감찰실장이었던 이건모씨의 견해. 그는 자술서를 통해 “국정원 회수분(테이프 2백여 개와 녹취록)은 전량 소각 조치했다”면서도 “다만 외부 상황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씨가 국정원에 반납한 테이프 이외에도 추가 파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했던 대목이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X파일 내용 중에는 당시 공씨로부터 반납 받은 자료에 없는 것들이 있어 공씨가 유출자료 전량을 국정원에 넘기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판단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99년 공씨가 국정원에 도청 자료를 반납할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 정치권 인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 국정원 내부에서 (공씨로부터) 회수한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소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래도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엇갈렸다. 이에 천용택 (국정원) 원장이 ‘소각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공씨가 (도청 테이프 등 자료를) 더 갖고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자료를 회수하러 갔던 직원들은 공씨와 평소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공씨가 자진해서 반납한 자료만 갖고 왔고, 그것을 소각 처리했던 것이다.”
이 인사의 증언에서도 공씨가 도청 자료 일부를 빼돌려 놓았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는 비단 공씨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도청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 라인의 다른 인사들에 의해 또 다른 X파일들이 당시 안기부 담장 밖으로 유출됐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전직 국정원 요원 등이 언론을 통해 진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92년 공씨가 팀장을 맡게 된 ‘미림팀’이 98년 해체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생산한 도청 테이프는 최대 2천여 개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99년엔 공씨가 보관했던 2백여 개만 회수했다는 것. 그렇다면 나머지 테이프와 녹취록, 보고서 등은 어떻게 처리된 것일까. 이에 대해 국정원은 “조사 사항은 원칙적으로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만 밝혔다.
그런데 공씨가 7월26일 자해소동을 벌이기 직전 언론에 배포했던 자술서에 “…이제 모든 것을 주검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염려했던 분들 안도하시겠지만 나라의 안정을 위해 참을 뿐입니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나라의 안정을 위해 참을 뿐”이라는 대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공씨가 추가 테이프나 문건 등을 보관하고 있지만, 공개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은 불과 하루 뒤 사실로 확인됐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7월27일 공씨의 자택에서 도청 자료로 추정되는 1백20분 분량 테이프 2백74개와 녹취보고서 13권(각권 2백~3백쪽)을 압수했다. 물론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많을 수도 있지만 지난 99년 국정원에 반납했던 테이프와 이번에 압수당한 것을 단순히 합하면 무려 5백여개에 달한다. 정권 교체 뒤에 직권 면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보험용’으로 파일을 무더기로 빼돌렸을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석연치 않은 의문은 남는다. 검찰 조사가 시작되면 당연히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리라는 사실을 공씨도 충분히 예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보 요원으로 30여 년 일한 그가 압수수색을 대비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이에 일각에선 “공씨가 ‘압수수색용’으로 테이프 일부를 자택에 보관했고, 나머지는 모처에 따로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편 ‘안기부 X파일’을 MBC 기자에게 전달했던 재미교포 윌리엄 박(한국명 박인회)이 추가 파일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공씨는 지난 98년 국정원에서 면직된 이후 동료 임아무개씨의 소개로 알게 된 박씨에게 ‘X파일’ 일부를 건넸다. 이 파일을 갖고 박씨가 삼성에 금품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 그리고 박씨는 공씨로부터 받았던 파일을 지난 1월초 MBC에 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공씨가 지난 98년 박씨에게 전달했던 파일이 현재 언론에 공개되고 있는 문건 세 개와 아직 방송되지 않은 도청 녹음 테이프가 전부였느냐는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 이외에도 박씨가 보관하고 있는 파일이 더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
이런 의혹을 불러일으킨 단초는 지난 7월26일 박씨가 MBC 기자 두 명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려 했다는 점이다. MBC는 소속 기자의 법인카드로 박씨의 미국 시애틀행 항공권을 구입해주기까지 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MBC가 제보자인 박씨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왔던 점이 입증됐다. 그러면서 MBC측이 박씨가 미국에 보관하고 있는 미공개 테이프나 녹취록 등을 인수하기 위해 함께 출국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강하게 불거졌다. 이와 관련 “미국에 테이프 2백여 개를 숨겨뒀다”는 주장도 있다(4~5면 참고). MBC측은 “박씨가 ‘미국에 뭔가 있다’고 해서 소속 기자들이 동행했다”고 밝혔다.
박씨가 언론에 제보한 파일 내용이 지난 99년 삼성을 찾아가서 보여줬던 문건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점도 별도의 파일이 존재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검찰도 지난 7월28일 박씨가 국내 체류 기간 동안 머물렀던 서울 상도동 박씨의 아버지 집을 압수수색했다. 언론에 보도된 문제의 ‘X파일’을 보관했던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 물론 미공개된 추가 파일이 존재한다면, 이를 수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시 오정소 대공정책실장으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나 최측근이 미공개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개연성도 있다.
미국에 체류중인 옛 안기부 직원 김기삼씨는 최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94년 ‘미림팀’이 재건된 다음) 공운영 팀장이 매일 오전 오정소 대공정책실장에게 녹취록만 갖고 들어갔다. 테이프는 당연히 공 팀장이 따로 보관했을 것이다. 보고 라인은 오정소 실장을 거쳐 정형근 기획판단국장과 황창평 차장으로 연결됐던 것으로 안다. 다 읽어본 뒤 경미한 내용은 오 실장이 직접 파쇄기에 넣어 파기했지만, 중요 내용은 이원종(당시 청와대 정무수석)-김현철 라인으로 전달됐다. 이것은 거의 확실한 내용이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당시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과 박상범 경호실장 등이 김현철씨에 대해 불평했던 내용이 도청에 걸려 경질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김현철씨도 도청 파일을 직접 접했을 것이고, 이를 일부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리고 ‘미림팀’이 운영될 당시나 해체된 이후의 국정원 고위 관계자 등이 X파일 일부를 보관하고 있을 개연성도 있다. 특히 공씨로부터 2백여개의 테이프와 문건 등을 회수했던 99년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천용택씨의 보관 여부도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관련, 천 전 원장의 한 측근은 “천 원장은 당시 ‘공씨에게서 회수한 테이프 등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며 테이프와 녹취보고서 등의 보관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면서 “현재 언론에서 공씨의 천 원장 협박설과 공씨와의 뒷거래설 등이 나오는 등 억울한 게 많지만, 일단 국정원과 검찰 등의 조사가 끝난 다음에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은 지난 7월28일 공개한 자술서에서 “설령 외부에 잔존한다 해도 이번 일로 세상에 나타나기는 불가할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공씨 자택에서 또 다른 X파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옴으로써 이 전 실장의 ‘예언’은 이미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도청 X파일’이 초대형 이슈로 부상하면서, 한여름 밤에 잠 못 이루는 ‘최고위층 인사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