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살인사건’의 용의자 김일곤이 검거되어 경찰서로 압송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시민이 합세한 김일곤 검거 순간(TV화면). 연합뉴스
“살려고 전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망가고 숨느라 급급했다.” 17일 오후 2시경 <일요신문>과 만난 동물병원 미용사는 이같이 말했다.
그녀가 일하는 미용실의 크기는 7㎡(약 2평) 남짓, 방문은 세 개였다. 하나는 병원의 접수창구, 하나는 호텔실(강아지 보관 장소), 나머지 문은 수술실로 통했다.
김일곤은 사건 당일 오전 8시 30분경 동물병원을 찾았다.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하기에 간호사는 그를 돌려보냈다. 9시 15분경 병원을 다시 찾은 김일곤은 “키우는 강아지가 불쌍하다,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며 간호사에게 개 안락사 약을 달라고 요구했다. 원장은 “강아지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약을 줄 수 없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강아지를 데려오겠다며 병원 밖을 나선 김일곤은 9시 50분경 다시 들어와 “와이프가 강아지를 데리고 올 거다.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의자에 앉아 혼잣말을 하거나 병원 곳곳을 배회했다.
10시 50분경 원장과 간호사는 접수창구 옆 진료실 안에서 길고양이를 치료하고, 미용사는 수술실 뒤편 애견 미용실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강아지 털을 깎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움직이지 마! 안락사 약 달라고 했잖아” 하는 고함이 울렸다. 김일곤이 회칼을 들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온 것.
원장은 “진정하세요. 안락사 약을 드릴 테니까 뒤쪽으로 오세요”라고 말하며 김일곤을 진료실 뒤쪽 수술실로 유인했다. 김일곤은 두 사람을 회칼로 위협하며 그들을 수술대 앞으로 몰아붙였다. 그가 더 가까이 오려던 찰나, 간호사와 원장은 수술실 안 미용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우당, 탕탕탕…, 쾅!”
미용사가 일하는 도중, 간호사와 원장이 뛰어 들어와 방문을 전부 닫고 잠갔다. “빨리 전화해!” 간호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미용사는 112를 눌러 “동물병원인데요, 여기 강도가 들었다”고까지는 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간호사에게 건넸지만 간호사 역시 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이 번갈아 전화기를 돌리다가 원장이 인근 성수지구대에 “누가 흉기로 우릴 위협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이 문이 열리면 죽는구나, 이대로 죽는구나.’ 간호사가 전한 방 분위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김일곤이 개 안락사 약을 달라고 난동을 부리다 도주한 동물병원.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그 사이 김일곤은 빙 돌아 반대편 문으로 다가와 문을 당겼다. 접수창구로 연결된 문은 발로 차도 열릴 수 있을 만큼 헐거웠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은 그 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문 열어! 경찰서에 신고하는 거 아니야? 안락사 약만 달라니까.” 김일곤은 소리를 질렀다. “신고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원장은 김일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문 밖에 인기척이 없자 세 사람은 각자 문을 하나씩 맡아 사력을 다해 붙들었다.
5분 정도 흘렀을까. 경찰들이 도착해 미용실 문을 열었다. 경찰은 동물병원을 구석구석 뒤지다가 김일곤을 뒤쫓아 밖으로 나섰다. 그는 동물병원에서 1㎞ 정도 떨어진 빌딩 앞 주차된 차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성수지구대 관계자는 “동료들이 순찰차를 타고 가는데 길 건너편에 차 뒤로 숨은 사람이 있었다”며 “수상해 보여 차를 인도 위에 세우고 불심검문을 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경찰의 검거 상황을 목격한 빌딩 경비원은 “아무리 경찰이라도 차를 이렇게 대놓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레슬링 하듯이 경찰들이 ‘넘어졌다 쓰러졌다’를 반복했다”고 설명했다.
“지갑을 탁 열고 이름이 딱 보이는 순간 김일곤이라는 세 글자가 보였다.”
김일곤이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자, 경찰은 김일곤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냈다. 그 순간 경찰들과 격투가 벌어졌다. 해당 건물 상인은 “경찰 둘이 수갑을 채우려고 그 놈을 뒤로 넘어뜨리려고 했는데 놈이 팔을 올려 칼을 들고 경찰을 찌르려고 했다”며 “그 때 어떤 50대 아저씨가 그놈 팔을 ‘딱’ 쳐서 칼이 차 범퍼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고 밝혔다.
시민까지 합세하자 김일곤은 점점 힘이 빠졌고 곧 제압됐다. 경찰 한 명은 그의 두 팔을 머리 뒤쪽으로 젖혀 잡았고 다른 경찰은 배 위에 올라타 수갑을 채웠다. 건물 경비원은 양 무릎으로 김일곤의 다리를 눌렀다. 칼을 뺏은 50대 남성은 “칼집에 묻어 있는 내 지문을 오해 말아달라”며 “엮이고 싶지 않다”며 자리를 떠났다.
“4242, 4242, 김일곤 잡았다.”
경찰은 암호를 부르며 무전을 쳤다. 빌딩 경비원은 “칼이 번쩍번쩍 했다. 무전 칠 때도 이놈 다리가 들먹들먹했어”라며 “경찰 혼자는 뭐 도저히 감당이 안 되더라고…. 그 위급한 상황에서 최후의 발악을 한 거여”라고 전했다.
성동경찰서에 들어서며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더 살아야 된다”고 거듭 말한 김일곤의 주머니에서 ‘살생부’가 발견됐다. 검거 당시 그의 주머니 속엔 커터 칼, 면도기, 차키, 메모지, 립스틱으로 보이는 물건 등이 있었다. 특히 메모지의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가로·세로 15㎝ 크기 메모지 2장엔 판사, 형사, 식당 주인 등 28명의 명단이 있었다고 한다. 메모지에 대해 김일곤은 경찰조사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나를 치료한 의사와 돈을 갚지 않은 식당 여사장 등을 적어놓은 것”이라며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김일곤이 검거되면서 ‘트렁크 살인’의 전말도 드러났다. 지난 9일 김일곤은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온 주 씨를 흉기로 위협해 목을 졸라 기절시킨 뒤 납치했다. 주 씨가 깨어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자 그는 천안시 두정동의 한 골목길에서 그녀를 잠시 내려줬다. 주 씨가 도망치려 하자 김일곤은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이 때 주 씨가 도망치려 하자 홧김에 그녀를 목 졸라 살해했다”고 밝혔다. 김일곤은 주 씨의 시신을 승용차 트렁크에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가 강원도 양양과 경남 김해, 부산, 울산을 떠돌아다녔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김일곤은 성동구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범행을 숨기기 위해 차량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