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정소씨가 매일 김현철씨에게 ‘노란봉투’에 도청정보를 담아 보고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
역대 정보기관 사정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 고위간부로 불법도청 조직인 미림팀 재건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오정소씨가 네 종류의 보고서를 ‘노란 봉투’에 담아 현철씨에게 거의 매일 전달했다는 것. 이 소식통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풀어야 할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연 문제의 ‘노란 봉투’ 안에 담겨 있던 보고서는 무엇이며, 대체 어떤 정보들이 기록돼 있었을까. 또 과연 현철씨는 이를 어디에 활용했으며, 당시 봉투에 담겼던 ‘알맹이’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새 X파일로 떠오를 ‘노란 봉투’의 비밀을 추적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미림팀의 활동은 1·2차로 구분된다. 1차 미림팀은 지난 91년 9월부터 YS정부(문민정부)가 들어선 93년 7월까지 운영됐다. 국정원은 “91년 7월 초 국내담당 차장이 미림팀을 과학화하기로 결정, 국내담당 국장을 통해 공운영씨에게 미림팀 편성을 지시했다. 이에 공씨가 주도해서 모두 5명의 요원으로 1차 미림팀을 조직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대선을 석 달 정도 앞둔 92년 9월 담당 국장이 “선거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는데 (불법도청이 발각되는) 사고라도 나면 감당할 수 없으니, 미림팀 활동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같은 해 대선 직후인 12월에 안기부 사무실 캐비닛에 보관중이던 도청 테이프 40~50개를 안기부 소각장에서 소각 처리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93년 7월, 1차 미림팀은 해체된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안기부의 ‘기관 출입 금지와 비노출 간접 활동’ 원칙이 정해지면서 정보 수집 실적도 덩달아 저조해졌다. 안기부가 불법도청의 유혹에 다시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차 미림팀이 해체된 지 1년 만인 94년 6월, 2차 미림팀이 재구성됐다. 미림팀 재건은 이보다 앞선 같은 해 초 안기부 대공정책실장으로 부임한 오정소씨가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림팀 재건 프로젝트는 오씨의 개인 아이디어였을까, 아니면 안기부 수뇌부의 방침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오씨가 누군가의 ‘의사’에 따라 이를 수행하는 매개인 역할만 했던 것일까. 현재까지는 경복고-고려대 동문으로 오씨와 친분이 두터운 김현철씨의 의사에 따라 2차 미림팀이 꾸려졌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씨뿐만 아니라 오씨 역시 당시 정황에 대해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상황. 김승규 국정원장도 지난 1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해 “오정소씨가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사실 관계에 대해선 진술하지 않고 있다”고 난감해했다.
오씨가 미림팀 도청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누구에게 보고했는지도 이번 X파일 사건이 남긴 커다란 의혹 중 하나. 이에 대해 미림팀→오씨→이원종 당시 대통령 정무수석(93년 12월부터 96년 8월까지 재직)→김현철씨로 이어지는 비선 보고라인이 구축됐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미림팀이 활동했던 시절 안기부의 정보 보고서는 네 가지로 분류됐다고 한다. △특(特)상보 △A상보 △B상보 △C상보 등이 바로 그것. 여기서 언급된 상보(詳報)는 자세히 보고한다는 의미. 안기부에서 상부에 보고하는 정보 수준에 따라 등급에 차별을 둔 것이다.
특상보는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보고서이며, A상보는 안기부장 등에게 전달되는 보고서를 지칭한다. 안기부장은 자신에게 보고된 A상보 내용을 검토한 다음 최상급 정보로 간주되거나,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되는 정보를 따로 추린다. 이렇게 추려진 정보를 대통령에게 별도로 전달한 보고서가 바로 특상보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소식통은 “특상보나 A상보는 시중에 나도는 단순한 첩보 수준을 넘어선 고급 정보”라며 “안기부 요원들이나 (미림팀의) 불법 도청 등으로 사실 여부가 확인된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다시 말해 특상보와 A상보는 사실 관계가 확인된 ‘팩트’만 담긴 그야말로 알짜배기 정보였던 셈이다.
따라서 미림팀이 암약했던 시절 YS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김덕씨(93년 2월부터 94년 12월까지 재직)와 권영해씨(94년 12월부터 98년 3월까지 재직) 등으로부터 특상보를 수시로 보고받았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이에 대해 현 국정원의 관계자는 “90년대에 안기부장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독대하면서 보고했던 내용이 특상보였다”며 “특상보는 안기부장에게 보고된 A상보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서 보고했던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B상보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파장에 예상되는 정보이긴 하나, A상보보다 사실성이 다소 떨어지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사실일 가능성은 높으나, 100% 사실로 단정짓기 힘든 정보들이 B상보에 해당됐다. 그리고 안기부나 경찰 등 당시 정보기관 요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입수한 온갖 시중 첩보들로 채워진 보고서가 바로 C상보.
국정원 관계자는 “90년대 안기부의 정보 보고서 양식은 현재 형태가 바뀌었다”면서도 “어떤 형태로 바뀌었는지는 보안 사항”이라며 언급을 피했다. 다시 말해 90년대 미림팀 활동 당시 작성됐던 안기부 정보 보고서가 그 양식과 명칭은 바뀌었으나, 여전히 비슷한 형태로 지금도 청와대 등에 전달되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정상적인’ 정보보고 라인이 오정소씨가 안기부 주요 간부로 재직하던 시절엔 궤도를 크게 이탈했다는 점이다. 오씨는 94년 초부터 95년 2월까지는 안기부 대공정책실장을, 95년 2월부터 96년 12월까지는 국내담당 1차장을 역임했다.
앞서의 소식통은 “오정소씨가 요직을 맡았던 시절 특상보부터 C상보까지 네 가지 보고서 대부분이 김현철씨한테 거의 매일 전달됐던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확인되지 않은 시중 루머부터 확인된 팩트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모든 정보가 ‘깔때기’처럼 현철씨에게 집중됐다는 것.
이와 관련, 90년대 안기부 등이 수집했던 각종 정보를 가공·편집했던 당시 안기부의 한 요원은 “오정소씨는 네 가지 보고서가 담긴 노란봉투를 김현철씨에게 전달했던 책임자였다”며 “노란봉투 겉봉에는 ‘안기부장 친전(親展)’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친전이란 편지 따위를 받아보는 사람이 손수 펴보기를 바란다는 뜻. 따라서 이 문구대로라면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김덕씨나 권영해씨가 노란봉투를 열어 봤어야 했다. 하지만 겉봉에만 ‘안기부장 친전’이라 적혀 있었을 뿐 실제로는 현철씨에게 전달됐다는 게 이 요원의 설명이다. 오씨가 비선 라인이었던 현철씨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부장 친전’ 봉투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현철씨가 부친인 YS나 안기부장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했을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현철씨가 오씨로부터 이렇게 전달받은 보고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
다만 전 국정원 직원이었던 김기삼씨가 “당시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과 박상범 경호실장 등이 현철씨를 비난했던 내용이 안기부 도청에 걸려 경질됐다”고 주장한 대목을 통해서 현철씨가 당시 보고받은 정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김기삼씨는 또 “(미림팀 도청 녹취록을) 다 읽은 오 실장이 직접 파쇄기에 넣어 파기했지만, ‘중요 내용’은 이원종-김현철 라인으로 전달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일요신문> 취재 결과, 오씨가 현철씨에게 ‘중요 내용’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루머’부터 ‘팩트’까지 거의 ‘모든 정보’를 통째로 전달했다는 의혹이 짙어졌다.
당시 현철씨에게 모든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극소수 안기부 직원은 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당시는 현철씨가 최고의 숨은 실세로 알려져 있었던 까닭에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안기부 직원들 가운데는 오정소 1차장-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김현철 라인의 사적 전횡에 분노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 공보실 관계자는 “당시 네 가지의 정보보고서가 김현철씨에게 모두 전달됐는지는 당사자인 오정소씨나 김현철씨가 증언해야만 진상을 알 수 있는 일”이라며 “실제로 오정소-김현철 라인이 가동했다면 비공식 정보 루트였기 때문에 현 국정원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답했다.
문제의 노란 봉투에 담겼던 구체적인 정보 내용과 그것이 어떻게 활용됐는가 하는 점, 그리고 현재도 이 정보 보고서가 보존돼 있을 가능성 등에 사실 확인은 이제 X파일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의 몫으로 남게 됐다.